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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사진미술관기획초대전
서늘한 집, 기억과 기록 – 강홍구 사진展
2010년 12월 17일 – 2011년 3월 6일


ⓒ 강홍구 그집-암벽, Pigment Print, Ink, Acrylic, 105X200cm, 2010


친숙하고 낯선 풍경 이미지의 앙금

강홍구의 풍경 이미지들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가속도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우선, 그것들이 한국 사회 근대화의 상흔을 직접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음으로, 그의 작업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변화를 작가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처리해 온 과정이란 점에서 그러하다.
글이나 이미지로 한국 사회의 근대화를 재현하는 것과 관련해서 우리는 그 동안 변화의 속도에 대해 많이 이야기해 왔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우리로 하여금 적응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그것의 속도가 아니라 가속도다.
강홍구는 한국 사회 근대화의 가속적인 변화가 만든 여러 틈새에 개입한다. 이러한 틈새가 생기는 것은, 가속적 변화라고 하더라도 사회 변동이 일방적으로, 전면적으로 매끈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라는 말이 잘 나타내고 있듯이 불균등하게, 그러니까 울퉁불퉁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서울의 변두리 지역, 그린벨트 지역, 재개발지역 등은 강홍구가 개입하고자 선택한 사회적, 역사적 틈새들이다.
강홍구 작품 대다수의 봉합선들은 그것이 희미하든 분명하든 간에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가속적 변화를 작가 나름대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예술적 징후다. 그것은, 사진과 관련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가속적 변화 과정 안에서 불가피하게 생겨난 입출력 장치와 저장 장치의 한계를 강홍구라는 작가가 제어해서 다루어 온 방식의 소산이다. 이러한 기술적, 경제적 한계를 나름의 예술적 방식으로 컨트롤하는 데 강홍구의 미덕이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강홍구의 봉합선은 위에서 말한 사회적 틈새의 예술적, 기술적 상관물이다. 강홍구의 작업은 ars(기예)라는 라틴어 단어의 역사적 분열--한 쪽으로는 근대 예술, 다른 쪽으로는 테크놀로지--을 개성적으로 다시 통합하는 데 멋들어지게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속적 변화들과 관련된 이미지 생산 과정에서 강홍구는 몇 가지 분명한 모범적인 면모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첫째, 부지런하게 발로 걸으면서 대면한 사회적 우연들을 사진 이미지로 포착해내고 있다는 점, 둘째, 미술사 맥락 안에 자기 작업을 그럴듯하게 설정해 둔다는 점, 셋째, 활자 문화의 마지막 세대이자 포스트모던 대중문화의 첫 세대다운 문화적 리터러시를 작업 과정에서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키네집>과 <수련자> 연작, 그리고 더 나아가서 <드라마세트> 연작에서 작가가 활용하고 있는 ‘발견된 오브제’들은 대중문화의 대표적인 시뮬러크르들이다. 그것들은 각기 디즈니 애니메이션, 격투 장르의 일본 비디오 게임 <철권>, 이제 전국적으로 수십개에 달하는 드라마세트장에서 강홍구가 발견해내서 자기 작업 안으로 가져온 것들이다. 이 오브제-시뮬러크르들은 강홍구의 작업 안에서 그의 미술사적 안목과 대중문화적 감수성이 어떻게 서로 융합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강홍구 작업의 특징은, 그러한 오브제-시뮬러크르들을 키취적으로 다루면서 만족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앞서 말한 한국 사회 근대화의 가속적 변화가 낳은 틈새 안으로 그것들을 끌어들이는 데에 있다. 심지어 <오쇠리 풍경> 연작에서는 현대 사회의 기술을 대표하는 비행기를 자신의 오브제로 활용하고 있다. 여행이라든가 휴가라는 것의 사회적, 문화적 의의를 이미 작가가 잘 통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라지다> 및 <그 집> 연작에서 강홍구는 버려진 빈 집들을 탐사한다. 집이란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 보자면 매우 이상한 상품이다. 기본적으로 내구 소비재이지만 가전 제품처럼 쉽게 바꿀 수는 없는 상품이다. 오직 자본과 국가 권력의 수탈 및 착취 행위에 의해서만, 또 그 수탈 및 착취 행위에 의한 대도시에서의 자본축적 과정에 의해서만, 버려지거나 철거되는 상품이다. 그 과정에 대한 사회과학적 해명은 이미 19세기에 맑스에 의해서, 20세기 들어와서는 하비와 같은 지리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바 있다.
재개발 이익이라든가 부동산 투자 이익 따위와 거리가 먼 대다수의 사람들이 내구 소비재인 집을 소비하고 전유하는 방식은 그 안에서 살면서 알뜰살뜰 꾸며가는 것만이 가능하다. 그 집들은 한때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살면서 뭔가로 가꾸고 늘어놓고 채웠던 것이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떠나가서 황량하게 비어있다. 빈 집들을, 그러니까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과 자취를 강홍구는 사진 이미지를 통해 집요하게 탐구한다.
한국 사회 특유의 근대적 가속도에 부대끼며 시달려 온 우리로서는 이러한 흔적과 자취가 한편으로는 매우 친숙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섭게도 낯설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들이지만 좀처럼 익숙해질 수는 없다. 난개발에 따른 무차별적 파괴는 본디 우리의 삶과 살림살이에 대한 공격과 학살을 뜻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사라지다-계단>과 같은 작품은 우리 삶에서 일상적으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영어로 'the uncanny(두려운 낯설음, 친숙한 낯설음)'로 번역된 프로이트의 ‘das Unheimliche’ 개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말 말고 다른 어떤 말로, 사람이 떠나간 집들에 깃들어 있는 유령적 상황과 상흔적 분위기를 제대로 표현해내겠는가.
바로 그러한 ‘das Unheimliche’와 대면하는 예술적 방식의 징후가 바로 이 작품 안의 희미한 봉합선인 셈이다. 강홍구의 봉합선은 사회과학적 인식만으로는 남김없이 해명되거나 회수되지는 않는 것들, 즉 우리 삶의 박탈된 뿌리와 예술적 행위에 내재된 앙금을 동시에 드러내준다.
다시 말해서, 그 봉합선은 이중의 의미에서 주권에 관해 뭔가를 보여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봉합선은 한편으로는, 본디 각자 자기 삶의 주권자이어야 했던 개개의 살아있는 인간들이 자본과 권력에 의해 뿌리뽑힌 채 내쫓겨난 다음의 자취와 흔적 이미지를, 즉 황량한 유령적 풍경의 이미지를 미묘하게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그 봉합선은 사회과학적이든 미학적이든 간에 논리로는 온전하게 해명되지 않는 바의 예술적 잔여로서의 앙금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이 앙금이야말로 사회적, 기술적 가속도의 힘에 저항하는 예술적 관성 질량에 해당하는 것이다. 예술가의 주권이란 본디 그러한 앙금을 똑바로 바라보고 제대로 다루어내는 데에서만 성립한다. 최근의 연작 <그 집>들에서 강홍구가 시도한 아크릴 페인트의 부가적이고 부수적인 덧칠은 바로 이 앙금과 관련된, 작가의 주권적 몸짓으로 읽힌다. 강홍구의 이러한 예술적 몸짓은 두려운 낯설음, 혹은 친숙한 낯설음을 복합적, 중층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 재현(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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