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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그리고 삶의 자리

침묵하는 돌
권태균 사진展

2011년 3월 12일 – 2011년 5월 15일


ⓒ 권태균<침물하는 돌>


침묵하는 돌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돌, 고인돌


고대 신석기인들의 매장풍습은 흙으로 시체를 덮는 토묘(土墓)가 주였다. 그러나 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사유재산과 부족의 개념이 생겨나고 문명이 꽃피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피안의 세계를 동경하게 되었고 영생에 대한 기대가 싹트기 시작했다. 특히 거석(巨石)에는 신비한 정령(精靈)이 깃들어 있어 인간의 길흉화복을 움직인다고 믿었다. 이때부터 청동기인들은 족장이나 권력자의 무덤에 거대한 돌을 얹어 정령의 보호를 기원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고인돌(支石墓, Dolmen)의 수는 대략 6만여 기다. 남한에만 3만여 기의 고인돌이 있고, 북한에도 2만 안팎의 고인돌이 남아 있어 우리나라는 국제적으로 ‘고인돌의 나라’다. 특히 2천여 기가 밀집되어 있는 고창의 고인돌과 화순, 강화의 고인돌은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한반도가 청동기시대에 강성한 부족국가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고인돌이 무덤으로 추정되는 근거는 무덤 속에서 돌화살촉이나 돌칼, 토기 등의 부장품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고인돌 무덤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여러 날의 작업 시간과 수백 명의 인원이 동원되어야 한다. 이로 미루어 고인돌은 상당한 경제력과 정치력을 지닌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당시 그만큼의 인원이 동원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집단 사회였음을 알 수 있고 이로써 고인돌이 청동기 시대의 유물임을 미루어 알 수 있다. 
한국의 고인돌은 산맥의 능선에 위치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강이나 계곡 등의 방향을 반영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물이 오는 쪽이 생명의 발원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물에 대한 숭배의식은 농업 문화권인 고대 한국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고인돌이란 명칭은 하나의 큰 덮개돌을 아래의 두 개나 서너 개의 굄돌이 괴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이처럼 거대한 돌을 당시 사람들은 어디로부터 어떻게 운반해온 것일까. 이 비밀은 고인돌이 위치한 장소를 주목하면 금세 알 수 있다. 돌은 해안가의 거대한 바위나 산의 암벽 중에서 단단하면서도 잘 쪼개지는 화강편마암이다. 아마도 돌의 결을 잘 아는 석수장이가 그 일을 주도했을 것이고 그는 단순한 장인(匠人)이 아닌 주술사였을 것이다. 돌의 말을 알아듣고 천문을 풀이하는… 
먼저 석수장이는 하늘에 기도한 연후에 바위에 작은 홈을 파고 그곳에 나무말뚝을 박는다. 그리고 물을 부어 나무가 부풀게 한다. 나무가 물에 불어 팽창하면서 바위가 결에 따라 서서히 갈라진다. 어쩌면 석수장이는 하늘의 별을 보고 비가 오기 바로 전날 나무말뚝을 박았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과정 자체가 하나의 신성한 의식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개인이 아닌 집단의 축제가 시작된다. 갈라진 바위를 운반하기 위해 통나무를 일정한 간격으로 땅에 깔고 전 부족민들이 밀고 당기며 바위를 무덤 위치까지 운반한다. 그 다음 흙산을 쌓고 그 위에 통나무를 깔아 덮개돌을 밀고 당겨 끌어올린 후에 흙을 제거하면 비로소 고인돌이 완성된다.
무덤으로 사용된 고인돌도 있지만 평지에 축조된 탁자식 고인돌은 하나의 상징물로 존재한다. 부족과 부족의 경계를 알리는 신호가 되기도 하며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단이나 사당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농사철에 비를 바라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고, 다른 부족과의 전쟁에 앞서 장엄한 의식을 치르거나 회의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때로 부족장이 병이 들면 온 부족민이 모여 부족장의 치유를 기도했을 것이다. 
내가 고인돌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80년대 중반의 일이다.
전남 고흥반도의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우연히 황토 언덕길 양 옆에 군락을 이룬 고인돌을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고인돌은 늘 내 곁에 있었다. 나는 몇 년 후에 다시 그곳을 찾았다. 그 때의 쓸쓸함이란! 
모종의 형태를 이루고 있던 고인돌 군락은 무참히 훼손되었고 길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돌들만 초라하게 남아 있었다. 
향토사학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만행은 일제강점기시대부터 한반도의 여러 곳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고 한다. 마을 앞에 신작로를 내거나 저수지를 만드는 데 고인돌을 함부로 옮겨다 썼고 집 마당의 고인돌은 장독대나 댓돌, 담으로 활용되었으며 때로 고인돌을 집안에 들여놓은 채로 집을 짓기도 하고 부엌의 부뚜막으로 사용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 돌들이 사라지기 전에 미처 사진으로라도 제대로 담아두지 못한 내 자신에 대한 자책감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나는 고인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갔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고인돌은 단지 무덤이나 제단, 상징을 떠나 주변의 풍경과 조화롭게 어우러진 자연으로 내게 다가왔고 나는 그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내고자 했다. 
자연은 사진작가에게 가장 진실하고 아름다운 피조물이다. 내가 찍은 수백 수천 개의 고인돌 사진은 역사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과의 공존이었다. 
고인돌은 영원한 항구성 속에서 침묵하는 돌이지만 말하지 않음으로써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그것은 지난 2천년이상 돌이 간직한 비밀의 이야기였다. 돌들은 비바람에 대끼고 무수한 별들과 대화를 나눴다. 꽃과 나비들이 놀다 가기도 하고 벅찬 희망을 품거나 혹은 좌절한 나그네가 잠시 등을 기대기도 했을 것이다.
여전히 돌은 침묵하고 있지만 풍경은 시대를 거듭해 변화해 왔고 내 사진들은 그것에 대한 기록이다. 차붓소처럼 그곳에 버티고 있는 고인돌 옆의 소나무가 베어지고 대신 전봇대가 들어섰다. 하천의 나무다리나 복찻다리 대신 인위적인 조형물과 건축물이 새로 생겨났다. 고인돌은 응축된 역사성 안에서 자연 그 자체가 되어 급속히 변화하는 현대 문명과 묘한 어울림을 이루고 있다. 그 속에서 내가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고인돌 자체의 리얼리티다. 나는 돌이면서도 돌이 아니고 문명으로 조성되었지만 이제 자연으로 회귀한 고인돌의 독특한 주술(呪術)에 매료되었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고인돌은 내게 하나의 아름다운 꿈이 되었다.

 

권 태 균(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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