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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사진미술관 본관 기획전
부산사진의 재발견 – 징후로서의 사진
몸, 방의 안과 바깥, 그 바깥

2011년 7월 16일 – 2011년 9월 25일


ⓒ Lee, Soon-Haeng, Mokpo 2006-2, 2011 ⓒ Kim, Kyung-Duk, Treasure 05, 2002


몸, 방의 안과 밖, 그 바깥


강선학 (미술평론가)

"존재의 가장 핵심적인 측면은 자아중심성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세계’ 및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환경)’를 향한 ‘탈중심성’이다. 탈중심적인 것으로서 인간은 외부세계에 ‘노출된’ 존재이며, 레비나스가 말하는 ‘의향성’을 향해 뻗어나가는 존재이다.“1)

이 전시는 집안과 집 바깥의 정경을 주 소재로 한 작품들로 이루어진다. 집 안이라 하지만 방을 말하고 있으며 그것은 몸이 거하는 곳으로서 장소 자체를 말한다. 때로 몸의 다른 말로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방의 안과 밖’은 집이자, 그 집의 바깥, 풍경을 말한다. 풍경은 때로 그 기원을 묻어버리기에 풍경으로 집을 보지 않고 근접의 장소로서 시점을 보이려 한다. “거주는 텅 빈 공간 안에 서는 것이 아니라 친밀한 공간을 얻는 일이기 때문이다. 집은 가까움과 따스함을 맛보는 곳이다. 이곳에서 인간은 타인을 만나고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다. 인간은 거주를 통해 위협적인 주변 세계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한다.”2) 집은 다름 아니라 거주의 안과 밖이다. 그것은 몸이자 몸 밖이며, 몸 밖이지만 장소가 아닌 어떤 것으로서 몸을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의향성이며, 노출된 존재이며, 인간이 탈중심화 되는 공간이다. 
  
방안의 풍경(?)들, 그리고 방밖의 풍경들, 그리고 더 멀리 있는 풍경들. 그것은 일종의 시선의 징후들이다.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읽지 않으면 그저 있는 것들이다. 해석을 요청하는 것은 곧 그것이 몸으로서 자리를 바꾸는 순간이고,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아니 그들을 만나는 순간이다. 우리가 사물을 만나는 것은 일상이다. 그러나 그 일상은 의미라기보다 관행이거나 관성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 관성을 어느 순간 보게 될 때, 지나가는 것들이 우리의 시선을 잡을 때, 사물이기를 떠나 징후로서 지각된다. 그 징후를 읽는 것이 사물을 읽는 것이며 삶을 읽어내는 것이다. 집을 바라보는 두 작가의 세계는 응시와 시선이라는 두 개의 대척점을 통해 우리의 안과 밖을 살펴본다. 이 정황은  흔하디흔한 우리의 주변이며 집이라는 삶의 거처로 이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두 작가의 시선과 사물이 우리를 바라보는 응시는 분명 우리를 주체로서 새롭게 내몰게 될 곳이다.
 
몸으로서 집, 비로소 관계를 이루는 집, 세계로 나서는 타자이면서 자아인 집, 그것은 당신과 내가 드러나는 곳이다. 그저 내가 이 세상에 발을 딛는 첫 경험으로서 방이라는 공간, 그리고 방을 나서는 낯선 체험으로서 바깥을 말하는 것이다. 김경덕과 이순행의 작품에서 그런 것을 만나게 된다. 아니 체감한다. 그들의 작품은 그런 촉감. 감각으로서 집을 느끼게 한다. 그것이면 된다. 더 이상의 의미는 미완성의 체험을 붙들고 애원하는 꼴이다. 그렇게 둔다. 그들이 만나는 세상의 체험, 미완의 형태와 의미와 관계를, 원초적인 공간으로서 집을 보이는 이 두 작가의 작품에서 우연히 메를르 퐁티를 만나고 레비나스를 지난다. 

“라캉은 메를르 퐁티의 응시 개념을 발전시킨다. 퐁티의 경우 응시는 모든 것을 보는 선험적인 주체이다. 곧 이 세계에는 모든 것을 보는 보편적 주체가 있다. 그러나 라캉은 이 세계엔 보여지는 선험적 존재가 있다. 말하자면 세계와 처음 관계를 맺을 때 보여지는 것이 주어진다. 주체는 보여지고 따라서 주체를 목표로 하는 응시가 있고 이 응시는 우리의 시각 장field을 벗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볼 수 없다. 상상계와 실재계의 분리가 가능한 것은 응시 때문이고 욕동은 실재계에 나타난다.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과 우리가 보는 것은 상상계에 속하고 욕동이 나타나는 영역은 실재계이다. 가시적 세계는 거울에 의해 형태가 주어지는 이미지들의 세계이고 거울 단계가 상상계의 원형이고 여기서 자아가 구성된다. 실재계는 볼 수 없는 세계이다.“3) 그들의 작품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만난다. 느닷없는 그 만남이야말로 그들의 작품이다.


김경덕/ 방, 내면의 충만과 빈 것의 응시

그의 작품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방의 사물들이자 정경이다. 이해도 오해도 필요치 않는 사물들이다. 그러나 그 사물들을 바라보면 어느새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바라보이는 시선을 느낀다. 그것이 방이라는 내밀함 혹은 개인적 공간을 들여다본다는 심리적 부담 때문일까. 그렇다. 그것은 분명 방안을 들여다보는 시선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 즉 응시를 일깨운다. 그 응시는 빈 방이다. 빈 것이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의 글씨, 문자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글을 읽지만 글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됨으로 내가 문자에게 읽히고 있다는 경험과 다르지 않다.

그의 일상에 등장하는 방에는 라디오, 책, 거울, TV, 전화기, 자명종, 리모컨이 때로는 남편이 등장한다. 다들 자신의 위치와 자신의 시선과 관심을 일깨우는 것들이다. 그런 면에서 방은 빈 것이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보게 만드는 장소이다. 비어 있지만 자신으로 가득한 곳이다. 

김경덕의 방은 일상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흔하디흔한 장면이고 너무나 일상적이라 무엇 하나 새롭게 보아내거나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문득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묻는, 자신을 호명하는 장소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잘 개진 이불, 가지런히 누운 베개, 반듯하게 놓인 방석이 문득 자신의 위치, 자신의 행위, 자신의 시선을 호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그 외의 것이 없다. 텅 빈 것으로서 자신을 만나게 한다. 텅 빈 것에 대한 주목이 그를 주목하는 이유이다. 텅 빈 것은 가역성으로 장소이다. 어떤 것으로도 변할 수 있는, 생성의 공간이며, 들뢰즈 식으로 말한다면 ‘되기’의 공간이다. 생성과 되기란 물론 내면의 변화와 내면의 움직임을 말하는 것이다. 내면이 하필이면 방안인가. 내면은 드러나지 않으면 알 수 없고, 드러나는 것으로 내면의 기미를 알아차릴 뿐이다. 그런 면에서 내면은 언제나 외형으로 드러나는 것의 잠재적 성질이며, 외형은 내면의 부재로서 전제된 외면이기도 하다.

김경덕의 방, 어디선가 환하게 방안으로 들어오는 햇살, 노란 장판이 환하게 자신의 빛을 잃어버리고 빛 그 자체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때로는 창을 가린 신문지의 글자들이 환하게 바래거나 휘발되어버린 듯 눈에 드는 아래로 가지런히 놓인 베개 두 개를 보게 한다. 벽의 그늘과 머리맡의 책 두 권, 어떤 이야기도 없다. 노란 장판, 휜 요, 분홍색 베개, 그리고 머리맡의 화집, 그런 정도의 변화는 변화라기보다 있는 것에 대한 섬세한 시선의 이동에 지나지 않는다. 

텅 비워 두었더라면 어땠을까. 베개 하나, 장판지만 드러나는 빛으로 가득찬 방, 창으로 들어서는 빛을 받는 텅 빈 방, 그러나 언제나 그는 그곳에 작은 카세트테이프나 라디오를, 베개나 책을 놓아둔다. 자신의 체취와 위치에 답하듯 그 곳에 있음을 보여준다. 레비나스를 빌려 말하면 그것은 향유다. 주체가 처음으로 드러나는 곳이다.

거울에 비쳐 드러나는 잘 캐 겨진 이불, 화장품 병 하나, 켜진 채 시선을 유도하는 TV, 번호판을 누르게 된 전화기, 벽 쪽으로 놓인 꽃바구니, 자신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것들이다. 자신이 거기 있거나 자신을 비춰주는 것들이 있는 곳으로 방이 거기 있다. 

때로 급하게 벗어놓은 잠옷, 남편의 모습은 타인의 개입으로 자신을 보아내는 자신의 역할을 보이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보려고만 하지 않는다. 촉감하려 한다. 방은 보기가 아니라 몸이다. 그 곳에 그가 들어설 자리가 있는 게 아닐까. 보기는 거리이고 사유이다. 그러나 방은 사유가 아니라 몸이 있는 곳, 몸으로서 사는 곳이다. 거주하는 곳으로 자신을 주체로 드러내는 곳이다. 그의 방은 장소가 아니라 형이상학이다. 
 

이순행/ 문이 닫혀 드러나는 빈 것에 놓인 시선

방을 나서면 바깥이다. 그러나 바깥은 어디까지일까 시선이 닿는 풍경이 바깥일까. 아니다. 풍경은 기원을 지운다고 하지 않았나. 풍경은 조작된 것이고 학습된 것이다.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것으로서 바깥, 방을 둘러싼 바깥, 현관, 대문, 골목, 골목의 풍경이 그런 것이다 그것은 이념이 아니라 몸에 가깝다. 아니 몸이다. 그래서 보려한다. 몸의 반응을 보아내려는 것이다. 그것이 이순행의 사진이다. 그것은 풍경을 통해 내면을 보거나 주체의 미세한 움직임을 간취하려는 것이다, 왜, 동작이 없는 선험적 있음으로 인간을 보려는 때문이다.

김경덕이 타자성으로서 방의 이해와 인식으로 읽혀졌다면 이순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타자성으로서 집과 이웃, 방 바깥의 것들이 관계를 맺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방 바깥은 그래서 때로 이념이다

사유하는 것은 분석하고 따지고 가늠하고 판단하고 취사선택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기능으로서 이성을 명석 판명한 것으로서 신뢰가 전제된 것이다. 그러나 일상 혹은 삶은 그런 사유 이전에 행위하고 행위가 느낌을 만들고 그 느낌이 체험이 되는 장소이다.     이순행의 이번 작품은 집이라는 구조 바깥에 붙어서 세계로 시선을 이어주는 첫 경험지로 그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계단참의 어수선한 시멘트 자국들, 그 모서리에 핀 풀과 갈라진 틈의 흔적들이 그렇다. 흑백의 대비가 뚜렷한 구조는 마치 평면처럼 느껴지고, 도보의 걸음은 어딘가 헛디딘 듯 시선을 혼란에 빠뜨리고 발 딛는 순간을 당황하게 한다. 

그곳엔 단숨에 거칠고 정리되지 못한 생짜의 타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시선을 둘 곳이 없다. 시선이 아니라 타자가 기다리고 있다. 시선은 지각으로서 몸이지만 시선의 대상인 사물과 서로 얽히고 만 몸을 지각하게 한다. 방 안에서 방과 자신이 구분되고, 구분이 잠재된 의식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면, 바깥은 내가 아니라 객관, 타자의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처음 만나는 지각체라는 이유로 해서 나에 대한 타자의 시선, 응시의 경험을 안겨준다. 시선이 닿는 곳이 아니라 시선 자체, 내 지각 자체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그것은 잠재된 내면이 아니라 바로 나의 행위가 되고 있다.  

두 팔을 벌리면 양손이 닿을 듯 좁은 골목길에 펄럭이는 태극기, 맞닿은 낡은 담벼락 사이로 새로 말끔하게 설치한 강철 대문, 그 길을 돌아서면 처마를 맞대고 그늘이 생기고 그 아래로 골목길이 이어진다. 그것은 이념이며, 무의식이다. 

무료하게 문 앞에 놓인 자전거, 길가로 내놓인 텅 빈 평상, 닫힌 문, 오래되었지만 풍모를 보이는 이층 적산가옥의 낡은 기와, 어딘가 틀어진 집의 선, 문 닫힌 유달서점과 미나서점, 청성악기사는 문이 닫혀 안이 드러나는 건물의 내면이다. 덧문까지 닫힌 상점, 샘터문구를 좌우로 마을길이 난 동네어귀는 풍경이 아니다. 방밖에 있는 건물의 내면이다.


유난히 눈에 띄는 적산가옥의 낡고 오래된 인상은 아물었지만 상처자국이 그대로 드러나는 과거이다. 광고전단지가 붙은 오래된 벽 옆으로 새로 하얗게 칠한 담은 담 안의 그늘로 더 짙어진다. 

뒤 벽을 터 창문을 냈지만 다시 철제 덧창살을 단 뒷모습은 여름풀 무성한 판자로 얽은 임시 가옥 앞의 키만 자란 파와 상추 같다. 빨랫줄이 얽이고 전기계량기가 여기저기 어수선하게 벽에 부착된 뒤 벽의 모습은 붉은 글씨로 번호를 휘갈긴 철거 직전의 모습에 다르지 않다. 소통할 수 없는 내면이다. 방 밖은 막힌 안이다. 기억과 상처가 흔적처럼 남아 있는 지점에서 이순행의 작업은 시작되고 끝난다.   

김경덕의 방은 내 시선의 확인, 내가 주체로 바라보는 시선 혹은 그곳에 내가 있다는 분명함을 준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가 없다는 것, 그것들이 나의 부재를 확인시킨다. 반면 이순행은 그 풍경의 낯섦, 혹은 익숙함 때문에, 시간의 거리 때문에 처음부터 내가 그곳에 없다는, 부재의 인상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곳을 바라보는 주체인 나, 부재의 나를 깨닫게 한다. 

재현의 방식을 보게 하는 대비적 작업이다. 우리가 어떻게 재현을 통해 사유하게 되는지, 사유방법, 스타일을 만나게 된다. 재현들이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우리에게 어떻게 작동하는 지를, 사유와 어떻게 접속하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나와 타자를, 주체와 객체를 끊임없이 생성하는 것이다.  

“나와 타자 사이에서 사이가 없다면 거기에는 상호성도 없을 것이다. 즉 인간과 인간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타자의 타자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다.”4) 그 타자는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방이며 내 집 바깥이다. 먼 풍경이 아니라 문을 여는 순간 만나지는 느닷없음에 있다. 그것이 이들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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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화열, 몸의 정치, 민음사, 1999,p.20 
2)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강영안 옮김, 문예출판사. 서울,1996.p.132-133 
3) 이승훈, 라캉 거꾸로 읽기, 도서출판 월인, 2009,p.131 
4) 정화열, 몸의 정치,민음사, 1999,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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