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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컨템포러리사진미술관 기획전
그날의 훌라송
2013년 5월 18일 – 2013년 7월 31일


ⓒ 강홍구, 광주, Pigment Print 28 x 40cm, 1995


누가 그 노래를 불렀는가
송수정(전시기획자)

낯익고도 낯선 선율
“시민은 놀라지 마십시오, 시민은 문을 열지 마십시오, 시민은 폭도를 숨겨 주지 마십시오. 시민은 군 작전에 협조해 주십시오.” 마지막 항쟁지였던 전남도청의 진압이 완료된 1980년 5월 27일 아침 6시, 계엄사의 선무방송이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선량한 시민과 죽어 마땅한 폭도만이 존재하는 비현실의 세계에서 선무방송 외에는 모든 것이 침묵으로만 존재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협박인지 회유인지 모를 낯선 방송과 함께 들려오는 배경음이 몹시 낯익다. 가사가 없어서 연관시키지 못했을 뿐 “손을 잡고 왼쪽으로 빙빙 돌아라”라는 동요곡이자, 시위 현장에서 많이 부르던 <훌라송>과 곡조가 같다.

당시 “노동3권 보장하라 훌라훌라” “계엄령을 철폐하라 훌라훌라” 등 4음절, 두 단어로 끝나는 모든 내용은 훌라송의 가사가 되어 세상에 퍼져 나갔다. 광주 금남로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우리들은 정의파다 훌라훌라. 같이 죽고 같이 산다 훌라훌라.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우리들은 정의파다”라는 가사는 <정의가>라는 애칭을 지닌 채 본격적인 민중가요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운동권을 대표하는 노래로 통했다. 그러나 광주 금남로에서 <훌라송>과 함께 뜨겁게 타올랐던 시민들의 열기는 계엄사의 <훌라송>과 함께 무참히 막을 내렸다.
계엄사가 시민들의 민중가요를 승전가로 삼을 만큼 심리전에 치밀했는지는 모를 일이나, 애초 이 노래는 미군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남북전쟁 당시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부른 <존이 귀향할 때(When Johnny coming back Home)>라는 군가였다. 우리나라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정도 되는데 전쟁에서 승리한 존의 금의환향에 술과 여자가 뒤따를 것이라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노래의 원래 고향은 아일랜드이다. 잉글랜드는 동인도제국 건설을 위한 전쟁에 식민지 아일랜드의 남자들을 강제로 징집해 갔다. 사랑하여 아이까지 임신한 여인이 전쟁에 징집된 뒤 팔다리를 잃고 돌아온 애인을 원망하면서 부른 <존 당신을 알아볼 수가 없어요(Johnny I hardly knew ye)>라는 반전(反戰) 민요가 바로 <훌라송>의 원곡이다. 미국의 장교가 이 노래를 개사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전혀 다른 성격의 노래가 되었다. 잉글랜드의 동인도 식민지 전쟁이 1800년대 초였으니, <훌라송>의 역사는 210년을 넘는다. 그동안 한반도의 작은 도시 광주를 비롯해 지구촌 곳곳에서 폭력은 계속되었으며, 숱한 이들이 폭력에서 이기기 위해 혹은 폭력을 멈추기 위해 이 노래를 불렀다.
《그날의 훌라송》전은 이렇듯 작은 노래의 엇갈린 운명에서 시작한다. 같은 장소에서 서로 다른 목적으로 불리던 이 노래처럼 역사를 바라보는 해석은 늘 어긋나게 마련이다. 이제 5.18은 민주화운동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불리고, 그날의 희생자들은 공동묘지 한편이 아니라 5.18국립묘지에 안치되었다. 사진 한장도 제대로 내놓을 수 없던 그 시절, 오로지 말로만 전해지던 소문의 진상들이 이제 번듯한 역사 기록물로 정돈되어 그에 걸맞은 격조 있는 기념식의 명분을 제시한다. 그러나 역사가 공인될수록 그 해석은 틀에 갇힌 채 정치적 냄새를 풍긴다. 공식처럼 나열되는 사진과 기록물 사이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부르던 노래는 실종된 채 이해 관계에 얽힌 기억의 정치학, 기념의 정치학만이 난무할 뿐이다. 《그날의 훌라송》은 사진을 통해 이 기억의 정치학에 균열을 내려는 전시다. 그러므로 5.18을 해석하고 증명하려는 전시가 아니라, 각자의 경험과 기억과 상황에 맞춰 각색한 사진들의 노래다. 때로는 커다란 파급력으로, 때로는 작은 웅얼거림으로 5.18을 둘러싼 사진들이 만들어졌다면 그 또한 어떤 역사적 우연과 필연이 담겨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작가 개개인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을 통해 기억의 정치학이 아니라 일상으로 스며든 기억의 사진적 방식들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사실의 기록과 재현의 상상력이라는 넓은 틀을 넘나들지만, 한편으로는 사진이 행하는 오류와 사진이 해낼 수 없는 한계까지를 짚어 내는 일일 것이다.

5.18은 없었다
특히나 기록 사진은 그 오류와 한계로부터 늘 자유롭지 못하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가 되었지만, 5.18 당시 신문기자들이 찍은 사진들은 신문에 실리지 못했다. 그럼으로써 이 실종된 증거 사진들은 오히려 사건 자체를 부정하는 증거로 작동했다. 5.18은 분명 존재했으나, 어디에서도 확인할 길 없는 존재하지 않는 사건이었다. 항쟁 당시 광주 시민들이 MBC와 KBS를 불태우게 했던 분노는 그들을 폭도로 몰아서라기보다는 그들 자체를 부정했기에 치솟았던 것이다. 그날 그들은 그저 유령이었을 뿐이다. 그곳은 그야말로 부재하는 섬이었다. 천정환 선생이 도록에 함께 실은 글에서 선거 때마다 투표 결과가 보여 주듯 현실 정치에서 광주가 여전히 섬으로 남아 있다고 얘기하는 것은, 이미 그 당시부터 광주는 분명 존재했으나 보이지 않는 섬인 채로 오랜 기간을 살아냈기 때문이다. 1988년 광주 청문회와 1995년 특별법 제정을 거쳐 이제 우리는 5.18에 대해 완벽하게 복원된 역사를 갖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우리의 착각일 수도 있다. 역설적이게도 전시에 소개하는 이창성, 나경택 두 원로 사진기자의 필름에는 5.18 당일의 사진이 없다. 5월 18일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뒤 광주에 본격적으로 공수부대를 투입한 날이고, 따라서 5.18민중항쟁의 발화점이지만, 사실 두 사진기자는 같은 이유로 그날 촬영을 하지 못했다.

나경택은 당시 전남매일신문 기자였다. 그가 기억하기에 5월 16일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벌어진 집회는 몹시 뜨거웠다. 광주전남 지역 교수 학생 시민이 총궐기를 했던 그날 밤 그들은 횃불을 밝힌 채 시국 선언을 했고, 그 정도의 대규모 시위면 정부가 나서서 뭔가 입장을 발표하리라는 모종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5월 17일에 이어 5월 18일은 당연히 시위가 소강 상태일 것으로 생각했다. 더군다나 5.18일은 일요일이었다. 그래서 나경택 선생은 그날 광주 시내에 있지 않았다. 이러한 판단은 서울에서도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5월 16일은 서울역에서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총궐기를 한 뒤, 정권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자진 해산을 한 터였기에 중앙 일간지에서 판단하기에도 광주에서 그토록 엄청난 폭력이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이런 이유로 중앙일보에서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창성 기자를 파견했을 때는 이미 18일 공수부대의 무력 진압이 시작된 시점이었고, 그는 해가 질 무렵에야 광주에 도착했다.
이번 전시에서 두 사진기자가 빠뜨린 5월 18일에 대한 공백은 한 장의 결혼식 사진과 오형근의 <광주 이야기>가 메운다. 당시 MBC 보도국에 근무하던 박찬호 선생은 MBC 사옥이 있던 가톨릭회관에서 바로 그날 혼례를 올렸다. 본래 12시에 식을 치를 예정이었으나, 신부가 격렬한 시위대를 뚫고 오느라 두 시간이나 늦게 식을 올렸다. 창밖에서 날아 들어오는 최루탄 가스와 함께 올린 눈물의 결혼식이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광주가 세상으로부터 고립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들은 이내 경주로 신혼여행을 떠났고, 광주 항쟁이 끝날 때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한편, 오형근의 <광주 이야기>는 영화 《꽃잎》의 금남로 항쟁 장면을 촬영한 다큐멘터리다. 촬영 당시 금남로에서 벌어진 상황을 다뤘다는 점에서는 진짜지만, 5.18을 재현한 가짜 이미지이기도 하다. 오형근의 사진 속에서는 진짜 배우와 엑스트라를 자청한 가짜 배우 겸 진짜 시민이 엉켜서 등장한다. 그 주변으로 구경을 나온 진짜 시민과 그들을 대상으로 진상 규명 촉구 서명을 받으러 나온 진짜 시민 단체, 경찰로 분한 가짜 경찰과 치안을 위해 파견 나온 진짜 경찰이 등장한다. 물론 영화가 설정한 상황은 항쟁 기간에 벌여졌을 법한 사건을 짜깁기했기에 그날은 18일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서 5월 18일은 갑작스러운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과 그에 맞선 시민들의 시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렇지 않을 것만 같았던 봄날의 결혼식과 진짜라고 믿고 싶은 가짜의 금남로 풍경으로만 존재한다.
진짜와 가짜의 애매한 경계가 오형근의 사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창성 선생의 필름을 보관하던 중앙일보의 파일북 사진 설명에는 폭도와 항쟁, 소탕이라는 말이 뒤섞여 있다. 필름이 사용되는 시점에 따라 같은 사진이면서도 전혀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었다는 뜻이다. 이제는 너무 식상한 이야기 같지만, 사진은 결코 객관적 사실을 기록하지 않는다. 설령 객관적으로 기록한다 할지라도 객관적인 사용이란 없다.
이번 전시에서 총 12롤의 필름을 밀착으로 보여 주기 위해 5컷 단위로 잘린 두 사진기자의 필름 총 130롤 분량을 일일이 대조해 일련번호를 맞추는 과정이 필요했다. 5월 18일처럼 기록할 수 없었던 순간은 물론이고, 찍었는데도 이제는 사라져 버린 필름이 군데군데 존재했다. 5컷씩 잘린 필름은 기억의 단위이자 사건의 단위와도 같아서 유실되어 버린 필름은 영원히 불러올 수 없는 기억의 공백처럼 존재한다. 당시 그들이 주로 쓴 필름은 이제는 생산조차 멈춘 코닥 Safety 5063인데, 역설적이게도 safety라는 말은 코닥 필름의 운명도, 기억의 완벽함도 안전하게 지켜 내지 못한 셈이다.

네 겹의 얼굴
나치의 학살로 동생 둘을 잃고 그 자신 또한 가스실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철학자 레비나스는 폭력의 경험을 바탕으로 선악의 문제를 뛰어넘는 무한 책임의 윤리학을 설파한다. 그런 그에게 얼굴은 타인의 고통과 사랑, 삶을 읽어 내는 소통의 통로다. 얼굴이란 모든 주체가 자기를 드러내는 통로이기에, 우리 모두는 서로의 얼굴을 대면함으로써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 속에서 그들만의 인간다움과 함께 죽게 마련인 유일한 존재를 확인한다. 그 얼굴은 역으로 그 자신의 헐벗은 죽음의 운명을 깨닫게 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 애틋함을 레비나스는 “나를 두렵게 하는 다른 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나는 결국 얼굴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읽는데, 바로 그의 연약함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나를 죽이지 말라’는 애원이다”라고 밝힌다.
이상일은 망월동에서 레비나스가 말하는 그 얼굴들과 마주했다. 5.18 당시 계엄군의 자리에 섰던 그는 제대한 뒤 사진가가 되기로 결심한 1984년경부터 신망월동이 들어선 1990년대 후반까지 해마다 망월동을 찾았다. 처음 찾았을 때만 해도 망월동은 저주받은 땅처럼 버려져 있었다. 마땅한 교통편도 없이 희생자가 너무도 그리운 이들의 걸음만 있을 뿐이었다. 그곳에서 가장 괴로운 일은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자기를 알아보거나, 그곳을 찾은 이유를 물어볼 것 같은 불안함 속에서도 그를 가장 불편하게 했던 시선은 바로 영정 사진이었다.
그 사진들은 죽음의 흔적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에 찍은 모습 그대로 여전히 살아 있었다. 살아 있는 얼굴로서의 그 사진은 그를 추궁하는 것 같았고, 죽어 있는 자로서의 그 얼굴은 그들이 죽은 방식에 비해 너무도 번듯해서 오히려 그들의 죽음을 모독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암실에서 일부러 빛을 길게 쪼이거나 약품에 오래 담가 두는 등의 방식으로 영정 사진의 형체를 변형시켰다. 한편으로는 그가 광주에서 가진 경험과 기억을 왜곡시키거나 잊어버리는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망월동 발길은 김영삼 정부가 망월동 건너편에 5.18국립묘지를 세우면서 뜸해졌다. 사람들은 두 개의 망월동을 구분하기 위해 신망월동과 구망월동으로 불렀다. 이제 5.18 당시의 폭도들은 민주화열사라는 호칭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고, 참배객들은 합법적인 이 공간을 버스 노선 518번을 타고 몸도 마음도 좀 더 수월하게 다녀간다.
노순택은 이상일의 발길이 뜸해지고, 민주화 운동을 둘러싼 성역화 작업이 한창이던 무렵부터 광주를 본격적으로 기록했다. 5.18이 합법화되면서 정치권이 앞 다투어 5.18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포장하고, 광주 전체가 5.18을 과잉해서 재현하기 시작할 때였다. 그야말로 기념을 ‘사업’하는 일이었다. 그의 눈에도 구망월동의 영정 사진이 유독 눈에 밟혔다. 하지만 너무도 선연해서 이상일을 괴롭혔던 사진이 이제는 너무도 바래서 노순택을 괴롭혔다. ‘나를 죽이지 말라’는 애원은 ‘나를 잊지 말라’는 애원처럼 들렸다. 건너편의 신망월동에 반듯하게 단장된 묘지와 새로 마련된 영정 사진과는 별개로 노순택에게 이 풍경은 5.18이 기념되는 방식이었다. 보르헤스의 말처럼 어차피 망각도 기억의 형식이었다. 광주가 민주화의 성지가 될수록, 정부와 단체들이 5.18을 기념하면 할수록 그날의 의미와 기억은 망각의 수순을 밟아 갈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노순택이 기록한 영정 사진과 이상일의 영정 사진은 30년의 시차를 두고 서로 닮아 있다.
여기에 덧붙여 오석근의 <비난수하는 밤>은 사라진 얼굴들에 대한 이야기다. 머물던 장소도 그들의 얼굴도 볼 길이 없는 행방불명된 이들을 작업 속으로 불러내 사진 속에서 존재하게 만든다. 반면, 김은주는 영정을 바라보는 얼굴에 주목한다. 자식이나 남편을 영정 사진으로밖에 만날 수 없는 희생자들의 어머니를 기록한 것. 5월 19일 시위대로 오인받아 공수부대의 총부리에 가장 먼저 살해된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의 어머니는 하얀 소복 차림으로 5.18국립묘지의 묘지 번호 1-1인 아들의 얼굴을 대신한다. 그녀들의 얼굴은 여전히 ‘나의 가족을 죽이지 말라’고 애원한다. 김은주는 이처럼 오랜 시간 조르고 설득하기를 반복해 굳이 이 어머니들을 그날 가족을 잃은 장소 혹은 가족이 묻힌 장소로 데려다 놓는다. 한편으로는 고통을 배가시키는 이 행위를 김은주는 눈으로 확인했던, 혹은 말로만 전해 들었던 그 장소와의 대면을 통해 떠나간 이를 온전히 기억해 주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설명한다. 실제 사진 속 어머니들은 김은주의 손에 이끌려 그날 이후 처음으로 그 장소를 찾아 사라진 얼굴과 직면하고 오열했다.

기억의 무기력에 대하여
김은주의 사진 속 어머니들처럼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각별한 기억의 터라고 해서 사라지지 않고 온전한 모습으로 지켜지리라는 것은 오산이다. 김혜선이 기록한 상무대는 이제 그의 사진 속에서만 기억의 장소로 남아 있을 뿐이다. 5.18 당시 시민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재판에 붙이던 죽음과 공포의 상징으로서의 진짜 상무대는 이제 아스팔트 밑에 깔려 버렸다. 그래서 김혜선의 사진이 보여 주듯 상무대가 사라진 땅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넓은 길이 닦이는 일련의 과정은 현실 사회 속 5.18의 운명을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상징적인 장소를 굴삭기로 밀어내는 일은 우리가 기억에게 행하는 가장 끔찍한 형태의 폭력이다.
물론 이렇게 사라진 상무대는 실제 위치에서 10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복원되었다. 망월동에 두 개의 무덤이 생겨나듯이 이제 광주에는 사라진 상무대와 새로운 상무대가 존재한다. 강홍구와 노순택의 사진이 보여 주는 새로운 상무대는 기념의 정치학이 낳은 가짜 풍경이자 텅 빈 기억일 뿐이다. 실제 현장이 아니었던 그곳은 더 이상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이제 그곳은 5.18을 학습하고 기념하는 멀쑥하게 박제된 공간일 뿐이다.
권순관의 작업은 이러한 기억의 무기력을 짐짓 아무 일도 없는 듯 시치미를 뗀 채 희화화시킨다. 그는 역사적인 기억의 장소에서 주도면밀한 각본과 연출, 섭외를 바탕으로 너무도 일상적인 혹은 너무도 뜬금없는 장면을 영화처럼 찍어 낸다. 금남로에서는 ‘늙은 남자의 멱살을 잡고 화를 내는 남자’가, 그 바로 옆 분수대에는 봄볕을 쬐듯 ‘앉아 있는 여자’들이 그리고 5.18기념공원에서는 합창단에 섞여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노래를 부르는 여자’들이 등장한다. 권순관에게 장소는 기억과 역사가 퇴적된 곳이면서, 동시에 기억의 역사화가 진행되는 곳이기도 하다. 기억의 역사화는 권력과 이데올로기를 유지하기 위한 미화 작용이 거듭되면서 그 장소에 깊이 퇴적한 기억들을 희미하게 만든다. 실제 금남로는 뜨거운 기억의 터이지만,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상은 실없는 멱살잡이만큼이나 가볍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관자만 가득한 그 거리는 5.18의 그날처럼 부조리하고 폭력적이다. 그래서 실제 5.18하고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5.18기념공원에서는 합창단이 격조 있게 노래 부르고, 상무대가 허물어진 채 풀만 무성한 공터에서는 젊은 여성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알듯 모를 듯 누워 있다. 그러나 권순관은 사진 속 어느 한 장면, 사진 설명의 한 단어에서조차 5.18과의 연관성을 누설하지 않는다. 어차피 역사적 장소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란 그러한 사전 정보와 선입관을 배제한 채 자기식 판단의 오류를 행하기 때문이다. 권순관의 치밀한 속임수는 분수대 사진에서 절정을 이룬다. ‘분수대에 앉아 있는 여자’들은 실제로는 김은주의 작업에 등장함직한 희생자의 어머니들이지만, 그의 작업 속에서는 그야말로 한가로운 소풍을 나온 시름 잊은 아줌마들로만 비춰진다. 김은주의 카메라처럼 의도해서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는 한 기실 역사의 모든 주인공은 무명씨였고, 익명의 존재였을 뿐이다.
조습은 이러한 풍자의 과정 자체까지도 부정함으로써 더 깊은 냉소의 의미를 담는다. 그의 작업은 점잖게 표현할 수가 없다. 아니, 점잖게 표현하지 못하게 만든다. 처음 보면 황당하다. 그의 작업 속에서 작가 자신은 한 마리 학으로 등장한다. 동시에 그 학은 학의 탈을 쓴 조습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 고상하지 못한 한 마리 학은 불쌍하고 청승맞게 긴 밤을 견디고 있을 뿐이다.
그날 광주 금남로는 강홍구의 작업에서 드러나듯 도망치고 싶은 무서운 전쟁터였지만, 한편으로 아이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어느 순간은 신명을 만끽하는 해방의 공간이었는데도 엄숙하고 비장하게 서술되고 있다면, 조습은 이러한 모든 기억의 방식을 노골적으로 무화시키고 조롱한다. 이 조롱은 사건 자체와 그 사건이 기억되는 방식뿐만 아니라 사건에 주목하려는 모든 시도까지도 해체시킨다. 결국에는 자신의 작품이 소개되는 전시와 그 전시에 참여하는 자기까지의 완벽한 부정이다.
역설적인 것은 이토록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럽고, 직설적인 수사로 점철된 그의 희극이 비극보다도 더 슬프다는 사실이다. 수령 450년인 전남대학교의 벚꽃은 그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곱고, 붉게 떨어진 동백꽃은 누군가가 기억하든 말든 여전히 붉고 선연하다. 그래서 그의 <달타령>은 이번 전시의 그 어느 사진도 보여 주지 못한 33년 전 광주의 진짜 풍경 속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계엄사가 폭도를 진압했다고 선무방송을 내보내고 하루가 지난 28일 수많은 주검이 망월동에 묻히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오열하며 머물다 떠난 그날 밤은 음력 보름이었고, 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형세를 띠어서 망월동(望月洞)이라 이름 붙인 그 무덤가에는 보름달만이 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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