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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컨템포러리사진미술관 연례기획전
당신의 필요와 요구 Needed and Desired
2014년 2월 15일 – 4월 30일


ⓒ 신은경, 전원의 변모, Pigment Print, 170x128cm, 2013


욕망을 사진 찍으면서 동시에 사진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것
: 신은경이 아이러니를 처리하는 방법

 
이영준(사진비평가)

이제껏 신은경은 사람들의 욕심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키치스런 공간들을 찍었는데 그때 좋은 점은 사진가 자신은 그 욕심들에 대해 무심한 듯, 거리를 두고 찍었다는 것이다. 즉 남들이 결혼식 하는 웨딩홀과 폐백식 하는 방들을 찍었는데 왠지 성격이 조신한 신은경 자신은 그런 데서 결혼할 것 같지 않게 찍은 것이다. 그 공간들에는 키치의 전형들이 가득 차 있다. 전형적인 이발소 그림인, 뒤에는 눈덮인 알프스산이고 아래는 물레방아 도는 경북 영양군인 그런 그림들, 혹은 럭키 모노륨이 깔린 한국 아파트의 침실에 배경으로 맥킨리산의 사진이 버티고 있는 모습들이다. 사실 키치를 소재로 삼는 예술은 1980년대말부터 한국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20여년의 짧은 역사 속에 그런 예술은 흥미로운 변화를 보인다. 처음에 키치를 소재로 삼았던 예술가들은 좀 높은 곳에 앉아 보통사람들이 고등어 먹는 것을 흉보듯이 예술을 했다. 예술가 자신은 전혀 고등어 냄새를 묻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런 예술이 건방질 뿐 아니라 재미가 없다는 것을 안 예술가들은 2000년대 하고도 10년쯤이 흐르자 키치와 예술과 자신들의 삶 사이의 구분을 두지 않았다. 그들이 입는 옷 자체가 키치였는데, 첫째 이유는 키치 중에 스타일이 괜찮은 것들이 꽤 있었고, 둘째 이유는 예술가라고 멋 낸답시고 프라다를 입으면 그게 더 촌스러웠기 때문이며, 세 번째이자 진짜 이유는 예술가들이 우아하고 비싼 옷을 살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래서 요즘의 예술가들은 키치 속에서 뒹군다. 그들에게는 독일의 프라이탁형제가 만든 가방도 너무 고급이고, 현수막 잘라서 만든 토트백이 제일 잘 어울린다. 신은경의 사진은 이런 태도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다른 예술가들이 다 키치에 파묻혀 사는데 나라고 그럴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사진에는 키치 공간이 나오지만 그녀의 사진은 키치가 아니다. 신은경은 그런 식으로 사진에서 평정심을 찾는다. 절대로 흥분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제일 괴로운 것이 흥분한 선생님이고 두 번째로 괴로운 것이 흥분한 예술가인데 신은경은 좀체로 흥분하지 않는다. 사실 저런 결혼식장에 갔다 온 어머니들도 친구와 전화로 “아무개네 셋째 결혼식에 갔다 왔는데 식장은 어찌나 촌스럽고 음식은 어찌나 싼마인지” 얘기하면서 흥분하기 마련인데 신은경의 사진도 분명히 그런 투이건만 흥분하지는 않는다. 결국 신은경 자신은 욕심이 없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신은경의 사진 자체가 욕심이 없다.
사진의 욕심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붙잡아서 시각적으로 내 것으로 만들자는 욕심이다. 원래는 이 욕심은 아주 경제적인 것이었다. 왜냐면 평당 3만원 하는 산 37만평 쯤을 사진으로 찍으면 111억원 어치 쯤 필름에 쓸어담은 것인데 사진의 비용은 그것 보다는 훨씬 적기 때문이다. 요즘 화소수가 많아서 가장 좋다는 페이즈원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도 카메라 값은 1억원 밖에 안 하니 여전히 경제적이다. 그 다음 앵글을 옮겨서 평당 2만원 하는 임야 50만평 쯤을 찍어도 쓸어담은 액수는 100억원이지만 사진의 추가비용은 거의 안 들으니 이 만큼 경제적으로 어떤 것을 전유하는 방식은 인류 역사상 없었다. 100억원 짜리를 100억원을 내고 사면 적당한 것인데 거의 공짜로 내 것으로 만드니 사진은 대단히 욕심이 큰 매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매체가 차지하는 위상이 커지자 (원래 미디엄이란 말은 중간에 있는 어떤 것이란 뜻이다. 즉 세상과 인간의 중간에서 둘 사이를 이어주는 게 미디엄이었다. 그런데 미디엄이 발달하고 성능이 좋아지자 미디엄이 세계를 밀쳐내고 자신이 세계 노릇을 하게 됐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계보다 미디엄에 열광하게 됐다. 이제 미디엄이 세계다. 매클루언은 틀렸다. 미디엄은 메시지도 아니고 마사지도 아니고 세계 자체다) 매체는 점점 비경제적으로 바뀌었다. 매체의 장비와 비용들이 비싸졌을 뿐 아니라, 매체에 쏟아 붓는 정력도 너무나 많아져, 이제 사람들은 매체를 통해 세계를 보지 않고 오로지 매체 그 자체에만 애정과 노력을 쏟아 붓는다. 무엇을 붙잡아서 내 것으로 만들자는 사진의 욕심은 매체의 욕심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욕심 그 자체가 아니라 욕심의 결과로 나오는 낭비에 대해 말해야 할 지경이다.
이런 지경에 예술가라면 매체의 욕심으로부터 초연해야 한다. 설사 욕심이 있다고 해도 없는 척 해야 한다. 정말로 욕심이 없이 그저 키치건 속물이건 강 건너 불 보듯이 쿨해져야 예술가다. 그게 바로 신은경의 태도다. 그녀의 사진을 보면 1990년대 초반 마치 자기가 이 세상에서 키치를 처음 발견했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던 예술가들이 생각 난다. 그런 예술가들이 지금은 전혀 키치스럽지 않은 성스러운 예술에 몸을 바치고 있는데, 신은경의 사진은 차분해서 앞으로 20년 후에도 어떤 것에 대해서도 흥분할 것 같지 않다.
이번에 전시하는 사진들도 차분하다. “당신의 필요와 요구 Needed and Desired"라는 제목 답게,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필요로 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찍고 있다. 영어 제목에는 you가 없는데 한글 제목에 당신이 들어간 점이 흥미롭다. 일상 영어에서 왠만한 주어는 다 you로 쓴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즉 영어권 사람들은 반드시 너가 겪은 일이 아니라도 주어를 you로 쓴다. 예를 들어 자신이 겪은 일을 말 할 때도 "You were very mad at racism, so you go like, don't call me a chink!" 이런 식이다. 사실 일상 영어에서 you란 없는 주어와 마찬가지다. 독일어의 Man처럼 그냥 아무나 될 수 있는 그런 주어다. 신은경은 그래서 영어제목에서 쓸데 없는 you를 빼버렸다. 어차피 있다고 한들 특별하게 누구를 지칭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당신의 필요와 요구’는 우리 모두의 필요와 요구이다. 자신이 사진 찍는 작가고 이미지의 주인이라고 해서 ‘나’의 필요와 요구를 내세우지 않고 있다.
차분하다는 것은 작가의 성격만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사진 이미지와 말, 대상이 맺는 관계가 호들갑스럽지 않고 조용히 얘기 한다는 뜻이다. 욕심 많은 사진들은 시끄럽다. 이거 정말 중요한 건데 모르면 너는 이 시대의 낙오자라고 외치는 듯한 사진들과는 많이 다르다. 사실은 신은경의 사진이 보여주는 내용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보여주는 양상이 차분하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우리는 어차피 말이건 이미지건 간에 진술을 통해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지는 못한다. 어떤 진술이 직접 대상과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표상하는 양상을 통해 관계 맺는 것이다. 개에게 ”먹지마!“ 할 때 개가 ‘먹지마는 먹다의 명령형이고 어미에 마는 아랫사람에게 쓰는 말이니 지금 주인께서 개인 나에게 먹지 말라고 강하게 명령하는 거로군’ 하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개는 주인이 말 하는 양상을 파악하고 그것이 뭔가 금지하고 있다는 제스처라는 것을 알아차릴 뿐이다. 사실은 인간이 언어를 알아듣는 것도 이런 식이다. 따라서 말의 양상 즉 스타일을 바꾸면 내용도 달라진다. 신은경의 사진에서 돋보이는 것은 돋보이지 않으면서 은근히 말 하는 그 양상이다.
이 작업에서 신은경은 사람이 하루에 필요로 하는 각종 알약들의 사진과 그 내용을 말로 써서 병치시켜 놨는데, 그 양상이 전에 하던 공간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웨딩홀의 키치공간과 하루에 먹는 약의 이미지는 완전히 다른 것이지만 말 하는 톤이 비슷하게 차분하니 같은 진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이미지를 욕망하는 자신과 일정하게 거리를 둔 태도이다. 사진가로서 가장 하기 힘든 일이다.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이미지에 대한 욕망이 있다. 남들이 못 본 이미지를 붙잡고 싶은 욕망, 남들이 찍은 것을 더 잘 찍고 싶은 욕망, 더 아름답고 신기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싶은 욕망, 예술적인 이미지로 일가를 이루고 싶은 욕망 말이다. 옛날에 산악사진 찍는 분들은 10일분의 쌀과 소주를 지고 설악산 소청봉에 텐트를 쳐놓고 공룡능선에 좋은 빛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는데, 일상의 모든 소소한 욕망을 포기한 듯한 그 분들에게도 좋은 이미지에 대한 욕망 만은 형형(炯炯)히 살아 있었으리라. 그래서 그 마지막 욕망을 버리기란 정말 쉽지 않은 노릇이다. 사진가이면서 이미지에 대한 욕망이 없다는 것은 마치 태권도 선수가 발차기를 못한다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사진은 이미지에 대한 욕망 때문에 결국 다른 시각예술에 지게 되는데, 사진 외의 어떤 시각예술도 대상을 잘 포착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진과 비슷하지만 매우 다른 예술인 영화나 비디오만 해도 기술적으로 이미지를 잘 포착해내는 것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진은 기이하게도 음악에서 통하던 명인기(비르투오조; virtuoso)의 개념을 어떻게든 살려내려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본인의 졸저 『사진 이상한 예술』 (눈빛 출판사, 1998)을 보기 바란다) 어쩌면 사진가들은 바이올린을 귀신 같이 다루던 야샤 하이페츠 같은 예술가가 되고 싶은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시대의 중요한 음악가는 슈톡하우젠이나 불레즈나 크세나키스지 더 이상 하이페츠가 아니다. 소리가 차폐된 방에 틀어박혀서 최고급 오디오로 고전음악을 즐기는 취향이 아니라면 말이다. 사진이 의고적인 예술로 머물지 않으려면 버려야 하는 욕망이 있다. 사진이 다른 예술에 졌다는 유치한 얘기가 나오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신은경이 사진에서 욕망을 다룬다고 할 때 겉보기에는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사진가 자신의 욕망을 다루고 있다. 사실은 욕망을 내비치지 않고 평이한 스타일로 사진을 만들어 욕망과 거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욕망을 버리는 것 보다 더 고차원적인 태도다. 왜냐면 욕망을 버린다고 선언했다가 버리지 못하고 추한 꼴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녀는 욕망을 버리겠다는 태도도 버린다. 그리고 그녀의 이미지는 어떤 것도 장악하지 않는다. 이는 매우 중요한 태도이다. 어떤 작가가 욕망의 문제를 다룬다고 했을 때 그는 사람들이 가진 속물스럽고 저급한 욕망들을 폭로해내면서 자신은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내세운다. 그러면서

자신은 욕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구름 위의 신선 같은 지위를 획득한다. 그런데 신선의 지위라는 것은, 사람이 그것을 획득하겠다고 외치는 한 회사의 이사님이나 상무님 같은 하나의 말뚝에 지나지 않는다. 그 말뚝을 차지하고 신선이라는 높은데 올라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한, 그는 결국 신선의 지위를 획득하려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매리 앤 돈이 말했듯이, 욕망은 남의 욕망에 대한 욕망이다. 예술가는 남의 욕망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함으로써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실현한다. 그의 욕망은 세속적인 사람들이 돈 조금 더 모으고 더 큰 집에 살려는 욕망보다는 한 차원 높지만, 여전히 욕망의 굴레에 묶여 있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진은 요물 같은 예술인 것이, 사진으로 찍어낸 이미지는 대상과 떨어져 있고 대상과 존재론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진 자체에 내재한 욕망의 그림자는 지울 수 없다. 보려는 욕망은 결국 장악하려는 욕망이다. 사진가는 그런 욕망에 깊이 얽혀 있는 사람이다. 그런 자신의 욕망부터 다루지 못하고 남의 욕망에 대해 다룬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것은 흡사 술이 엉망으로 취한 엔지니어가 술도 깨지 않은 채 원자력 발전소를 고치겠다고 달려드는 것과 비슷하다.
신은경은 남의 욕망에 대해 보여줌과 동시에 자신의 욕망은 살짝 감춘다. (아예 욕망이 없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얼핏 보기에 이 사진들은 사람들이 가진 세속적인 욕망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 전의 공간 사진에서도 그런 태도를 엿보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요즘 동시대예술에서 범람하는 ‘000을 비판하는 작가’라는 말 만큼 실속 없고 피곤한 말도 없다. 광주비엔날레 홈페이지를 보면 참여작가들에게 다 그런 칭호가 주어져 있고, 뭔가 비판하지 않는 작가는 비엔날레 작가의 축에도 못 끼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그런 작가들이 정말 비판적인지도 모르겠고, 왜 꼭 뭘 비판해야하는 지도 모르겠다. 고슴도치가 무엇을 비판하기 때문에 첨예한 가시를 등에 잔뜩 이고 있는 걸까? 혹은 독사는 무엇을 비판하기 때문에 독을 품고 있는 걸까? 그것은 그들의 존재방식이다. 작가는 자신의 존재방식 자체가 남과 다른 사람들이다. 그 세세한 차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작가가 뭘 비판하고 있다고 섣부르게 예단하는 것이다.
신은경은 비판해야 한다는 요구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비판을 비판한다. 이제까지 작가들이 뭔가를 비판해온 방식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뭔가를 비판해야 작가노릇을 한다는 그 명제로부터도 거리를 둔다. 비판을 비판하는 사람은 정중동 속에서 자신만의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그녀의 공간사진은 한없이 정적이지만 마음 속에 물결을 일으킨다. 정적이기 때문이다. 그 사진들이 말이 많고 메시지를 강요하는 식이었다면 그 소리들은 노이즈가 되어 결국엔 사진에서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사진들이 조용하기 때문에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저런 데서 폐백하고 시집들을 가는구나’ 하는 소리가. 하지만 그 소리는 혼자서 조용히 뇌까리는 소리다. 그 사진들은 아무 말 없이 소매를 살짝 잡아끄는 듯이 다가온다. 그래서 천천히 관조하게 되고 젖어들게 된다.
알약사진들을 통해 우리가 하루에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도 꼭 우리가 이런 것 없으면 살 수 없는 한심한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신은경 자신도 이런 약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들린다. 왜냐면 ‘당신’은 ‘나’일 수도 있기 때문에. 너가 나가 되는 변증법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이 사진은 별 의미가 없다. 그 알약들을 먹는 것이 ‘너’에 그치고 만다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너’가 나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사진들은 우리 모두에 걸쳐 있는 주체와 사물의 관계망에 대해 다루고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조용히 말이다.
알약들이 나오고 나면 양평의 물가에 지은 멋진 집들 사진이 나오는데, 이것을 사유재산을 통해 경관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속물적 취향에 대한 비판이라는 식으로 보는 것은 상투적인 시선이다. 사실 이런 곳에 멋진 집을 짓고 살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이 사진들은 그런 욕망이 허위고 속물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는 그런 사진들이 많았다) 그런 욕망의 화신인 그런 집들이 있다고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 그런 집들의 양식과 앉음새에 대해 말하면서 말이다. 신은경은 그런 집들을 보고 있는 자신에 대해 조용히 관조하고 있다. 모든 욕망을 잊은 듯이.
사실은 신은경이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 관조하고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이제까지 사람은 사진과 풍경이 벌이고 있는 줄다리기를 즐기며 그 와중에서 풍경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어부지리를 취해왔다. 이런 사진을 봤더라면 당연히 저 집의 양식이 속물스런 사이비 서양식 어쩌고 저쩌고, 건축허가가 나지 않는 상수도 보호구역인데 누구의 연줄로 허가를 받고 어쩌고 저쩌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풍경은 자기 것으로 끌어들여 이용할 수 있는 자산이나 정보가 아니다. 그냥 저런 세계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일부라고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그래서 이 사진에는 어떤 결론도 들이밀려는 욕심이 없다. 한편으로는 정말로 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그 말은 우리가 신은경에게서 억지로 끄집어낼 것이 아니라 그녀의 사진을 보면서 우리 스스로 지어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물론 그 사진들 끝에 나오는 인용문들은 좀 상투적이라 사족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런 주택에 산다는 것 자체가 성공이라는 말과 공통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 정말 살기 좋을 것 같아요.” “정말 모두가 꿈 꾸는 그런 집이네요.”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단정을 내릴 필요는 없다. 신은경이 사진과 말을 섞어서 벌이는 표상의 게임에서 재미를 볼지는 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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