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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컨템포러리사진미술관 기획전
DOCUMENTARY STYLE 다큐멘터리 스타일
강용석, 이상엽, 주명덕
2014년 12월 9일 - 2월 25일


ⓒ 주명덕, 한국의 가족, 논산, Gelatin Silver Print, 40.6x50.8cm, 1971




스타일은 자아(自我)다
1.
《다큐멘터리 스타일》전은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어제와 오늘을 ‘형식’의 관점에서 조망해 보려는 시도다. 사진의 스타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진의 내용을 결정하는 형식들의 총체다. 말하자면 앵글과 구도, 원근법, 조명, 명암대비, 톤, 초점과 같은 눈에 띄는 시각적 요소에서부터 프레임의 구성, 피사체와의 관계설정, 장면에 대한 지각방식, 현실을 보는 관점에 이르기까지 사진의 의미를 결정하는 모든 형식적 요소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 요소들이 유사하게 되풀이될 때 사진가의 스타일이 나온다. 이 요소들의 반복을 지배하는 법칙은 없다. 다만 사진가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일정한 형식을 반복함으로써 스타일을 만든다. 마치 개인의 말투나 옷차림, 식성 등 일상의 행위들이 반복을 통해 습관으로 체화되어 그 개인 고유의 스타일로 굳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사진의 스타일은 말투나 문체와도 비슷하다. 어떤 내용을 말하든 한 사람의 말투는 같다. 결국 사진의 스타일은 내용이나 주제와 상관없이 사진가가 구사하는 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 스타일’은 워커 에반스를 통해 처음 구체화된 용어다. 그에 따르면 다큐멘터리 스타일은 ‘자료(document)’가 갖는 객관성, 중립성, 엄정함, 무미건조함 등을 형식적 요소로 취한 사진의 스타일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사진은 스타일만 취했을 뿐이므로 ‘자료’는 아니다. 따라서 다큐멘터리 스타일은 유사한 형식을 따르는 모든 사진에 적용될 수 있으며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는 장르는 본래 따로 없다. 그러나 오늘날 다큐멘터리 사진은 ‘거의’ 하나의 장르처럼 통용된다. 이는 다큐멘터리 스타일을 하나의 단일한 형식으로 인식하는 데서 오는 오류다. 다큐멘터리 스타일이 특정 장르에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또한 그 스타일에도 다양성이 있다. 말하자면 사진가는 다큐멘터리 스타일을 자기 방식대로 소화해 낸다. 그것은 사진가 개인의 감성이나 취향, 생각과 맞물려 변화무쌍한 형식을 낳는다.
그렇다면 다큐멘터리 스타일이 지닌 의미는 무엇일까? 스타일이 단지 사진가 개인들 간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형식적 요소들의 집합일 뿐이라면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물론 스타일은 단지 개인을 따라다니는 외적 특질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기록의 방법론(methodology)과는 다르다. 예를 들면 고고학, 인류학, 민속학 등 학문의 영역에서 정립한 사진기록의 방법론은 엄밀한 원칙을 따른다. 이런 방법론에 영향을 받아 유형학을 사진기록에 끌어들인 아우구스트 잔더나 그 후예인 베허부부의 사진도 그렇다. 그들의 사진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으며 거기에서 파생된 방법론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스타일이 아니다. 반대로 스타일은 아주 모호하고 추상적이며 개념을 따르지도 않는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스타일의 중요한 의미가 나온다.
사진의 형식을 결정하는 대부분의 요소는 기계적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사진가는 카메라의 광학적 법칙과 이미지를 형성하는 화학적 법칙을 벗어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요컨대 사진가는 기계가 허용하는 한에서만 ‘자아’를 발휘할 수 있다. 물론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부단히 노력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 한계의 내부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은 매우 제한되어 있고, 바로 그 때문에 개인의 차별성은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는다. 사진가들 간의 차이는 그래서 주로 피사체의 선택을 통해 결정되곤 했다. 그리고 실제로 모더니즘 예술의 원리에 따라 ‘시각적 혁신’을 추구했던 일부 작가들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사진가들 사이에 형식의 측면에서 차별성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말하자면 ‘누구나’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계의 스타일이지 사진가 개인의 스타일이라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사진가가 자기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갖기란 매우 어렵다. 한편 작가의 독창성 개념에 원리를 둔 모더니즘 패러다임은 자기 스타일을 갖지 못한 사진가들의 작업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것은 신문, 잡지를 비롯한 대중매체에 실리는 사진이나 관광지를 뒤덮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취미, 여가활동의 산물과 형식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를 지향했던 사진가들은 ‘무엇’을 찍을 것인지 못지않게 ‘어떻게’ 찍을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왔으며, 결국 본질적으로는 후자가 훨씬 중요한 많은 것을 결정하곤 했다. 시각예술의 의미가 ‘시각성(visuality)’에 따라 규정되는 이상, 그리고 이 ‘시각성’이 형식적 요소에 지배받는 이상 말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만약 사진이 현대문화의 시각적 감성을 지배하는 매체라면, 덧붙여 다큐멘터리 스타일이 단지 기록의 형식이 아니라 시각적 감성을 표현하는 형식이라면 그것은 사진가 개인의 고유한 어법이라는 의미를 훌쩍 뛰어넘는다. 이를테면 다양한 유형의 다큐멘터리 스타일은 우리 시대의 감성적 차원을 첨예하게 드러내주는 언어다.

그런데 이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 스타일을 결정하는 원리는 있다. ‘자료(document)’가 사실의 확인이나 입증의 수단인 이상 거기에는 자료 생산자의 주관이나 감정이 개입돼서는 안 된다. 자료는 철저하게 중립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만약 자료 생산자의 사적 견해나 해석, 감정이 개입한다면 자료가치는 훼손된다. 결국 자료 생산자는 자료가 담고 있는 내용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기만 하면 된다. 사진의 특성은 이 요구에 충실히 부합한다. 인간의 개입이 최소화된 ‘기계적’ 기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진가가 자신의 주관을 가급적 배제하고 카메라의 기계적 속성에 따라 대상을 중립적으로 기록할 때 자료가치는 극대화된다. 그것이 ‘대상 중심적’ 스타일, 즉 객관주의적 스타일이다. 하지만 이런 객관주의가 문자 그대로 유지되기란 어렵다. 카메라는 기계적으로 대상을 기록하지만 그 기계장치를 작동시키는 자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원근법이나 구도, 앵글, 프레임 등의 효과를 통해 대상을 해석해서 기록한다. 비록 개입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미세하더라도 거기에는 이미 사진가의 관점이 있다. 이 개입이 적극적일 경우 ‘주체 중심적’ 스타일이라 부를 수 있겠다. 나아가 ‘대상 중심적’ 스타일에도 주체의 관점이 있다. 사진의 ‘객관성’이란 관념적으로만 가능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결국 스타일의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는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른 편의적 구분일 뿐이다.

이 구분에 따라 《다큐멘터리 스타일》전은 크게 두 개의 섹터로 나뉜다. ‘객관주의’ 섹터에는 주명덕, 강용석, 손승현, 이상엽의 작업을, ‘주관주의’ 섹터에는 이갑철, 이상일, 노순택, 박홍순의 작업을 포함시켰다. 이 구분 역시 임의적이다. 스타일의 차이는 ‘개념적’이지 않고 단지 ‘시각적 효과’를 받아들이는 감상자의 ‘감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진가 각각을 규정한 용어 역시 스타일의 전형성을 강조하기 위한 임의적 표현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이 전시에서 제안한 스타일은 감상자의 주관에 따라 상이하게 읽힐 수 있다.

2.
먼저 ‘객관주의(Objectivism)’ 스타일의 유형을 보자.
주명덕의 <한국의 가족>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형식적 특징은 ‘무미건조한(dry)’ 스타일이다. 본래 이 작업은 사회학자 이효재와 함께 한국의 변화하는 가족 구조를 파헤친 기획이다. 여기에서 주명덕은 급속히 진행된 산업화로 전통적인 대가족제가 해체되고 새로운 가족 형태가 등장하는 과정을 꼼꼼히 추적하고 있다. 마가렛 미드와 켄 하이만의 공동작업 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한국의 가족>은 문화인류학적 방법론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사진은 켄 하이만의 그것과 다르다. 켄 하이만이 《인간가족전》의 감상주의에 가깝다면 주명덕은 그로부터 거리를 둔다.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개성이나 그들 간의 관계, 심리상태 등을 드러내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고 가족 구조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인류학, 민속학 사진에서 주로 사용해 왔던 방법론을 끌어들인다. 인물을 일렬로 배열하고 정면에서 가족 구성원 전체를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다. 얼굴표정이나 포즈는 가급적 배제함으로써 감상자의 감정이입을 막기도 한다. 말하자면 가족을 ‘연구대상’으로 설정하는 셈이다. 그 결과 감상자는 사진 속의 가족을 한국의 가족구조를 전형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표본으로 대하게 된다. 인류학적 방법론이 무미건조한 스타일로 나타나는 셈이다.

‘중립적(neutral)’ 스타일을 보여주는 강용석의 <매향리>. 여기에 사용된 형식적 요소들의 의미는 분명하다. 작가는 전통적인 포토저널리즘을 지배해 온 형식들이 감정의 과잉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설득의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고 본다. 과장된 원근법과 조명, 강한 톤과 명암대비, 사선형 앵글이 불러일으키는 역동성, 부분적 프레임 등은 저널의 독자들에게 성찰의 기회를 박탈해 버리고 강렬한 ‘시각적 효과’만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즉 포토저널리즘의 형식은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전달함으로써 매체의 당파성을 홍보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용석이 끌어들인 형식적 요소는 중성 톤과 단조로운 프레임 구성, 정방형 포맷(6x6)이다. 명암대비를 최소화하고 은은한 회색 톤으로 화면 전체를 처리함으로써 강한 톤이 불러일으키는 시각적 긴장감은 사라진다. 프레임 구성도 그렇다. 정방형 포맷이 가져오는 상하좌우의 균질적인 공간감과 균형 덕분에 프레임 속의 모든 요소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조화를 이룬다. 결국 사진가가 ‘매향리’를 보여주는 방법은 감상자 스스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둔다. 그것이 ‘중립적’ 스타일의 전략적 의미다.

손승현의 ‘직설적(direct)’ 스타일. <삶의 역사>에서 작가는 재외동포들의 초상을 솔직담백한 형태로 보여준다. 사람의 얼굴은 개인사를 그대로 반영한다. 제아무리 감추려 해도 얼굴에는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다. 눈, 코, 입의 형태, 피부, 주름, 흉터 등 얼굴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은 그 사람이 살아 온 삶의 가장 정직한 증인이다. 작가는 모국을 떠나 살아야만 했던 이들의 굴곡진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피사체와 당당히 대면한다. 혹은 그들이 카메라 앞에 당당히 서도록 한다. 복잡한 카메라 워크를 구사하지도 않는다. 정면에서 가장 단순한 앵글과 프레임으로 그들의 얼굴과 마주할 뿐이다. 또한 배경을 단순화시킴으로써 초상에만 시선을 집중시킨다. 작가는 얼굴 표면에 묻어 있는 그들 삶의 흔적을 충실히 드러낼 뿐이다. 그들의 역사를 말하기 위해서는 다른 부연설명이나 수사가 필요 없다. 단지 사실(fact)을 기술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결국 손승현의 ‘직설적’ 스타일은 ‘사실’을 최소한으로 기술하기 위한 시각적 방법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최소한의 기술’이 이미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이상엽의 ‘웅변적(eloquent)’ 스타일. 한국사회의 주요한 정치, 사회적 이슈를 집요하게 추적해 온 작가가 메시지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취하는 스타일이다. 이는 오랫동안 포토저널리즘의 영역에서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사용해 온 카메라 워크와도 관계가 있다. 작가는 사태의 맥락을 누락시키지 않기 위해 포토에세이 형식을 끌어들이기도 하며, 상황을 함축적으로 응축시켜낸 장면과 정황만을 묘사한 장면을 적절히 혼합함으로써 발언의 강약을 조절하기도 한다. 마치 말의 높낮이를 조절하거나 특정 단어를 억양을 통해 강조함으로써, 또는 말에 감정을 실어 자기주장의 타당성을 극대화시키는 웅변가의 호소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 스타일은 메시지를 짧고 강렬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전달하는 데 유효하다.

3.
다음은 ‘주관주의(Subjectivism)’ 스타일. 사실 ‘객관주의’ 스타일에도 작가의 주관이 깔려 있으므로 주관주의와의 구분이 큰 의미는 없을 수 있다. 다만 차이는 주관주의 스타일로 분류된 작가들의 스타일에는 그것이 좀 더 명시적으로 나타날 뿐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시각적 요소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는 이갑철의 ‘역동적(dynamic)’ 스타일이다. <충돌과 반동>에서 작가는 민간신앙, 무속, 유가나 불가와 관련된 다양한 형태의 전통문화를 파격적인 카메라 워크를 구사하여 보여주고 있다. 원근감의 강조가 불러일으키는 공간에 대한 의식, 정적인 분위기와 균형을 무너뜨리는 사선 구도, 거친 입자, 인과관계가 없는 요소들의 병치, 극적인 순간포착, 피사체를 절단하는 프레임 효과 등이 그것이다. 이로 인한 시각적 효과는 강렬하게 나타난다. 하나의 장면은 그것과 연결되어 있던 현실의 장면과 다시 유기적인 관계를 맺기도 하고, 그 자체로서 완결성을 지닌 채 역동성을 부여받아 새로운 현실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사진 속의 인물은 탄력을 받아 금방이라도 프레임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보이거나, 인물의 움직임은 화면 속에서 지속되어 ‘영원한’ 동감을 보존하기도 한다. ‘역동적’ 스타일은 그런 점에서 ‘정지’ 이미지인 사진에 운동감이라는 환영을 부여한다.

이상일의 <망월동>은 ‘장엄한(pathetic)’ 스타일, 말하자면 비장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스타일이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5.18 광주민중항쟁의 비극은 여전히 진행형임을 희생자들의 영정과 유가족의 모습을 통해 묵묵히 주장하고 있다. 망월동 묘역을 기록하는 작가의 시선에는 음울함과 산 자로서의 속죄의식이 복합적으로 섞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 전체를 휘감고 흐르는 어두운 톤과 무덤 위로 가늘게 쏟아져 내리는 가냘픈 빛은 스산함을 가중시킨다. 무덤 옆에 홀로 놓인 훼손된 영정사진과 국화송이, 타다 남은 향 등을 크게 부각시킨 화면구성도 이에 한몫 하고 있다. 묘지와 하늘, 무덤과 사람의 명암대비를 최소화시킴으로써 화면 전체는 음침한 분위기로 뒤덮여 있다. 기록은 엄밀하고 냉정해야 하지만 희생자들에 대한 작가의 내밀한 감정을 속일 수는 없다. 결국 <망월동>의 ‘비장한’ 스타일은 슬픔과 연민, 부끄러움과 죄의식 등이 복합적으로 뒤섞인 감정에서 비롯되었다 하겠다.

노순택의 ‘알레고리적(allegorical)’ 스타일. 그의 작업 대부분을 지배하는 공통된 문제의식은 특정한 대상을 ‘매개’로 삼아 표출된다. 예컨대 <얄읏한 공>은 레이돔, <조류도감>은 사진 찍는 사람들, <어부바>는 아이를 ‘매단’ 어른들이 ‘표적’이다. 이 눈에 보이는 대상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각각 분단체제와 감시망, 사진의 폭력, 가족 이데올로기이다. 물론 문제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더 멀리 나갈 수도 있다. 관건은 노순택이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피사체를 ‘볼모’로 삼아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문제를 들추어낸다는 점이다. 여기에 사용되는 수사법은 곧 비유와 상징, 암시와 같은 것들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사진이 알레고리적일 수도 있겠지만 노순택의 알레고리는 매우 풍부하고 또 의도적이다. <국기복용법> 또한 예외가 아니다. 첨예한 정치, 사회적 이슈가 터져 나오는 현장에서 국기는 특정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시키는 도구로 활용된다. 즉 ‘나’의 발언은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국가’의 이익, 즉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정당화 담론을 등에 업는 셈이다. 결국 이 작업에서 나타나는 알레고리적 스타일은 국가라는 상징권력에 대한 풍자로 작동한다.

박홍순의 ‘서정적(lyric)’ 스타일. 작가는 한국의 국토를 마치 지도를 작성하듯 꼼꼼히 기록하겠다는 원대한 계획 하에 <대동여지도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이 기획은 한국의 자연을 ‘아름답게’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우리의 국토는 근대의 풍경 대부분이 그러하듯 개발이 할퀴고 지나간 상처로 얼룩져 있다. 산은 산대로, 강은 강대로, 또 바다는 바다대로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간직한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말하자면 우리 국토의 곳곳은 이미 인공의 폐허다. 박홍순의 작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장소는 그렇게 개발의 생채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풍경들은 서정적이다. 이는 아마도 작가가 우리 국토를 그렇게 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작가는 개발의 잔해로 뒤덮인 우리 자연을 애처로운 시선으로, 하지만 애정이 담긴 시선으로 본다. 그것이 이 작업의 바탕에 면면히 흐르는 서정적 스타일을 낳는다.

4.
앞에서 언급한 작가들의 작업은 다큐멘터리 스타일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비록 위의 규정이 모호하고 부정확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스타일은 본래 개념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서 여러 속성들을 함께 서술함으로써만 소통될 수 있다. 하나의 스타일에는 유사하지만 상이한 다른 요소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타일을 ‘보편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다양성은 그렇게 나온다. 같은 이유로 다큐멘터리 스타일은 언제라도 변할 수 있다.
이 전시는 다큐멘터리 스타일을 한 작가가 구사하는 그만의 고유한 어법으로 가정했다. 하지만 이런 가정은 무너질 수 있다. 그리고 실제 한 개인의 고유한 스타일을 찾아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스타일은 모방을 통해 퍼져나가면서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일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게다가 위의 작가들 또한 자기 사진의 스타일을 무수한 모방과 학습의 과정에서 만들어냈다. 말하자면 그들의 사진에는 아우구스트 잔더도 있고, 로버트 프랭크도 있다. 당연히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에도 워커 에반스가 있으며, 다이안 아버스의 사진에도 잔더가 있다. 하지만 정확히 같지는 않다. 마치 스승에게 오래 영향 받은 제자의 스타일이 스승의 그것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것처럼 말이다. 결국 문제는 독창성도, 고유함도 아니고, 모방도 아니다. 개인의 스타일은 나의 ‘자아’가 무엇을 수용하여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켜 내느냐에 달려있다. 따라서 스타일은 ‘자아’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외부세계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현상들을 때로는 받아들이고 때로는 거부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 수용과 배척의 방식에 따라 스타일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타일은 단지 형식적 요소들의 집합이 아니라 개인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근원적인 의식의 반영이자 태도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 스타일에는 결국 사진가의 사고와 세계관, 감성이 집약적으로 농축되어 있는 셈이다.

박평종(미학, 사진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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