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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사진미술관 연례 기획전
부산 참견錄 – 해안선, 숨의 풍경
2014년 3월 1일 – 2014년 4월 30일


ⓒ 최광호, 영도 봉래산, Digital C-Print, 50x76cm, 2013


《숨의 바다: 최광호가 보는 국경일과 부산 바다》


이광수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 교수)

사진가 최광호는 만나자마자 내게 기장에서 본 한 광경을 들려주었다. 멸치를 잡아 올린 그물을 터는 풍경, 작가가 사진을 찍는 한 시간 내내 그 늙은 어부는 쉬지 않고 그물을 털더라는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작가가 그 어부에게 물어보니 그 똑같은 동작을 한 시간 전부터 해왔고, 그 후로도 한 시간 더해야 한다고 했다고 했다. 그로부터 한참 후 그는 동쪽 끝 기장 앞 바다에서 본 그 멸치 털이를 서쪽 끝 다대포 바다에서 또 보았다. 다대포 후리 소리와 함께. 그는 그 바다에서 사람 냄새를 맡았고, 전율했다. 부산의 바다를 일터로 삼고 사는 사람들에게 노동은 유희다. 작가는 그로부터 우리가 보는 바다가 아닌 그들이 사는 바다의 살아 있는 싱싱함을 끄집어 올린다. 작가가 바다를 보면서 그들이 노동하는 배를 찾고, 그들이 사는 뒷골목, 시장, 논밭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그곳으로 일부러 발길을 옮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천제를 지내는 간절한 기원, 용왕신에게 바치는 촛불의 염원, 할배 당산나무 할매 당산나무에게 드리는 치성의 곳곳에 그들의 삶이 있고, 숨이 있다. 그들 바다 사람들에게는 해가 뜨고 해가 지는 바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해가 뜨는 숨 터, 해가 지는 삶 터가 중요한 것이다. 24시간 삶이 있는 숨 쉬는 바다. 그 바다가 사진가 최광호 가슴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부산의 바다는 최광호 안에 그렇게 자리 잡는다.

최광호의 사진 키워드를 들 수 있다면? 내가 발랄하게 물었다, 1년 내내 그와 동행하면서 이번 사진 작업을 함께 해 온 방송작가 허윤정에게. 묵직하게 답이 날아 들어온다. ‘밝다’와 ‘즐기다’. 그가 사진을 하는 것은 그에게 삶이라는 밝고 즐겨야 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 세상은 감동이고 희망이다. 스스로를 가꾸면서 살아가는 삶, 그 삶을 사진과 함께 살아가기에 그는 사진을 밝게 하고, 즐기라 하는 것이다. 그가 사진가가 되려면 딱 5년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되뇐 것도 이 맥락 안에 있으니, 이 소위 최광호의 ‘5년론’ 안에는 모종의 조건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밝게, 즐기면서 사진을 해야 한다는 것, 사진적 낙천주의다. 그가 보는 사진가는 낙천적으로 세상을 보면서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진을 찍으러 가는 최광호의 길은 항상 밝고 발랄하다. 사진 찍으러 가는 길이 아무리 프로젝트에 매인 일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무겁고, 심각하게 머리 싸매면서 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같은 곳을 갈지라도 갈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고 했다. 물론 가는 시간이 달라 빛이 주는 느낌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은 장소이지만 그가 서로 다른 삶을 지닌 사람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가 최광호에게 대상으로서 동일한 장소란 없다. 그가 바다를 찍는다지만 실제로는 사람이 사는 삶을 찍기 때문이다.

왜 자꾸 벗으시지요? 이번엔 내가 작가 최광호에게 직접 물었다. 돌직구를 던졌는데, 의외로 날아오는 답이 경쾌하다. 바다란 자연이다. 커다란 자연. 자연은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고. 그러니 그 안에 사람 사는 땀이 있고, 물성(物性)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벗는다. 항상 그래 왔다. 수업 중에도 그랬다 했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 숙제를 해오지 않은 학생은 옷을 다 벗고 수업을 들으라고 했다. 숙제를 안 해 왔으니 수업을 들을 자격이 없는데, 정 듣고 싶으면 벌을 받으면서 들어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그런데 왜 많고 많은 벌 중에 옷을 벗으라는 것인지 물었다. 기왕에 벌을 받으려면 사진적으로 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했다. 사진적이라? ... 사진이란 궁극적으로 사람을 향하는 것, 사람은 몸에서 태어나고 몸으로 일하다가, 몸이 사라지며 없어지는 존재. 시간에 따라 존재를 드러내면서 그 시간이 더 많이 가면서 그 존재가 사라져버리는 게 사진적 이치와 몸의 이치가 닮았다. 그래서 최광호의 삶이나 사진이나 항상 몸이 그 중심이다. 그래서 틈만 나면 스스로도 벗고, 남도 벗긴다. 할머니를 벗기고, 아내를 벗기듯 자신이 벗는다. 그것은 몸이 자연이자, 물질이 자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광호에게 사진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도구이자 방편이다. 그렇다면 도구이자 방편이 아닌 본질은 무엇일까? ... 사진은 결국, 항상 그렇듯, 최광호에게 삶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되묻는다. 본질은 무엇일까? 화두 안에서 사진가 최광호는 삶의 근원을 찾는다. 그리고 바다로 향한다.

부산의 바다를 찍은 최광호 사진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최광호 자신의 몸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그가 사진을 통해 50대 사진작가 최광호 그 자체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 동안 사진을 하면서 쌓아두었던 모든 것을 여기에 붓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최광호라는 자신, ‘나’란 무엇일까? 끝없이 고민을 한다. 그 겹겹으로 쌓인 ‘나’를 어떻게 하면 사진으로 담을 수 있을까? 그러면, 이제 의문은 사진과 나는 또 무엇일까, 이다. 나는 대상을 통해 내 자신을 어떻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일까? 나의 그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일까? 그가 오래 전에 출판한 책 이름이 ‘나는 사진이다’인 것은 바로 이 고민이 자신의 사진 역사 40 년 내내 자신을 붙들어 매왔던 바로 이 화두였음을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준다. 사진작가 최광호가 카메라를 든 것은 사진이 나이고, 나는 살아 있는 생명체이자 숨소리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최광호의 부산 바다 사진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한국 사진사에서 ‘광호 타입’이 나오게 된 것은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다. 자아를 찾으러 가는 과정, 무릇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죽게 되기 마련이고, 숨 쉬는 모든 것은 늙게 되기 마련이다. 사진이란 무엇을 하든지 작은 행위 하나하나가 사진과 관련되면서 그 속에서 ‘나’를 찾아가는 것이라는 게 최광호의 사진론이다. 그래서 그에게 사진을 찍어 만들어 놓은 이미지는 단순한 하나의 원 재료일 뿐이다. 그것을 프린트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의 생각하는 바를 집어넣는다. 그가 사진 위를 걷고, 사진 안에 자기 몸을 던지기도 하고, 고의적으로 빛을 집어넣어 그 빛의 우연에 결과를 맡기는 포토그래밍도 하고, 필름을 현상하면서 적정 시간을 넘겨 은염을 부식시켜 프린트를 하기도 한다. 그것은 은은 흙이고, 흙은 죽음으로 연결되고, 결국 사진은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담아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이미지 안에 넣어 그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다. 이것이 바로 ‘광호 타입’이다. 최광호가 바라보는 부산 바다 사진의 핵심이 바로 이 ‘광호 타입’적 세계관에 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온 부산의 바다는 숨소리가 나는 바다고, 그 숨소리의 바다는 영겁의 세월을 견뎌 왔고, 그 세월의 한 가운데 ‘나’ 최광호가 있다. 사진 첫 시작에도 최광호가 있고 끝에도 최광호가 있는 것은 바로 사진을 통해 존재하는 ‘최광호’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은 작가의 강렬한 의지이자 소망이다.

사진 그 자체로서는 코드를 갖지 못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 한계를 극복하고 사진 외부로부터 강력한 코드를 집어넣음으로써 작가의 뜻을 제시하는 언어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사진은 그의 실존적 행위에 따라 이제 말할 수 없는 기표에서 말하고자 하는 기의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그 기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를 전달해주면서 소통의 관계를 만든다. 그러면서 이제 작가에 의해 사진은 보는 대상으로부터 읽는 대상으로 탈바꿈한다. 언어, 각자의 생각과 뜻을 전달하는 그 언어는 세계 각지에 셀 수 없이 많다. 그렇지만 그 언어는 그 문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무용지물일 뿐이다. 그 언어로 그들은 아무런 소통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광호의 사진은 이 개별 언어, 기표 언어에 대한 도전이다. 그들을 모두 소통하게 하는 보편 언어. 최광호의 부산 바다 사진은 바로 그 보편 언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사진작가 최광호를 자유로운 영혼이라 부른다. 그는 항상 어떤 틀로부터 벗어나 있다. 특정한 틀에 따라 규정하는 것, 그것을 벗어나는 것 그것 또한 그에게는 또 하나의 숨이자 삶이다. 짜여 진 각본에 따라 어느 정도 미리 기획하고, 사진의 원래 성격에 따라 프레이밍 하고, 뷰파인더를 통해 세상을 재단하기도 하지만, 최대한 우연성을 살리는 것이 사진적인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그것은 사진이라는 것 자체가 카메라라는 기계 장치에 빛이라는 통제 불가능한 요소가 들어가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 때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선조들이 자랑스럽게 가꾸어낸 도자기 예술이 만들어지는 이치와 비슷하다. 도공은 그 표면에 흠이나 티가 전혀 없고, 유약이 완벽하게 퍼진 도자기를 최고의 것으로 치지 않는다. 가마 속 뜨거운 불, 그 통제 불가능한 요소가 우연한 작용을 하면서 예기치 않은 색과 자태를 만들어낸 것이야 말로 진정한 작품이다. 사진가 최광호가 사진 한 장, 한 장은 물론이고, 사진 작업 전체를 만들어 낼 때도 끝까지 우연을 배제하려 하지 않는 것에서 우리는 최광호의 사진 정신이 조선의 어느 도공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를 두고 ‘사진적’이라 말한다. 그에게 사진은 우연에 기대어 물 흐르듯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대상에 대해 치밀한 연구를 하지 않는다. 책을 읽고, 공부하고 사물에 접근하면 영감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를 맡아 부산 바다를 처음 찍기 시작할 때 주변의 부산 사람들에게 외지인인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 아무 데나 데리고 가달라고 했다. 본인이 미리 정보를 찾아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계획을 잡아 동선을 결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 갈 때는 그냥 구경 하듯 찍는다. 그리고 그곳을 다시 찾을 때 정해진 어떤 목적에 따라 찍는다. 그렇지만, 그 또한 여전히 구경하듯 찍는 것을 전제로 하고 나서의 일이다. 이 점에서 최광호는 롤랑 바르트와 참 많이 닮았다. 프랑스 남부 작은 도시에서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어린 시절을 지냈던 바르트는 산으로 난 작은 길을 통해 외부 세계와 접촉을 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길이 갖는 소통의 의미보다는 그 작은 길 가는 도중에 주변의 이런저런 것들을 구경하고 그 세계에서 유희하는 것이었다. 최광호가 가는 사진 찍으러 가는 길이 바로 그러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진 찍는다는 것은 대상과의 몸을 통한 교감이고 그로부터 나누는 감동이 우선 된다는 사실이다. 바르트나 최광호나 모두 길은 소통이라는 목적의 도구가 아닌 구경이라는 경험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정신이 아닌 몸과 접촉이 있다. 그렇게 보니 두 사람 안에 모두 어머니와 할머니라는 존재가 무겁게 자리 잡고 있다. 우연일까?

그렇다고 그의 사진에 기획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그는 우리가 갖는 뭍에서 바라보는 바다라는 습관적 시각을 극복하기 위해 광안대교에 올랐고, 가덕도에서는 99세 할머니를 찾아가 바다에 걸린 그의 굴곡진 인생사를 들었다. 항구 출입을 허가받아 시설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고, 바다가 보이는 아파트를 물색하여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사는 실제의 공간에 들어가기도 했다. 모두 철저한 기획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그의 기획은 미리 중심 개념을 설정하고 그에 따른 소재를 찾아 맞추는 것이 아니다. 중심 개념을 설정하지 않고 장소를 기획하되, 물리적 어려움 때문에 그 장소를 촬영할 수 없게 되면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그 대체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우연을 만나고, 거기에서 그의 사진이 나온다. 우연이라는 외부 인자가 침입해 들어와 마음의 평정 상태를 깨고 발생시키는 것이 바로 사유라고 하는 들뢰즈의 사유와 비슷한 맥락에 서 있다. 이것이 최광호가 사진으로 내러티브를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사진가 최광호가 보는 부산 사람들은 바다를 통해 생각하고, 바다와 함께 살고, 바다를 통해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진가 최광호가 그들에게 묻는다, 그대에게 바다는 어떤 존재냐고.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용궁으로 간 토끼가 용왕에게 땅을 아무리 설명해도 용왕은 알아먹지 못했을 듯, 그들은 작가에게 바다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 바다는 한 외지인이 보는 그 바다일 뿐이다. 제헌절 날, 거울을 들고 해운대 바다로 나간 것도 외지인의 바다를 찍고 싶어서였다. 작가는 사람들에게 거울을 하나 씩 들고 서 있으라고 부탁했다. 왜 거울입니까, 라고 내가 물었다. 그 때 난, 거울은 예술 미학을 말할 때 자주 일컫는 ‘삶을 비추는 예술에 대한 상징’으로서의 거울일 걸로 짐짓 예단하며 물었다. 그런데 그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제헌절은 법을 만든 날이고, 법이란 우리를 비춰보게 하는 거울이라서, 거울이라고 했다. 참으로 최광호다운 생각, 천진난만한 아이의 생각이다. 바닷가를 찾는 그들에게 제헌절은 그냥 쉬는 날, 국경일일 뿐이다. 작가도 그래서 국경일 날이면 부산으로 내려왔다. 쉬는 것이야말로 자연이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야 말로 그가 말하는 삶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부산의 바다를 국경일이라는 키워드와 연결시킨다. 그 연결은 바로 쉼과 삶의 연결이고, 그 안에 회생하는 자연과 삶이 살아 있다.

그는 사진 작업을 하는 1년 내내 처음 다대포에서 주운 차돌 하나를 손에 쥐고 꼼지락거리면서 다녔다. 그는 그것이 바다이고 그것이 숨이며 삶이라 했다. 수많은 세월, 억겁의 세월 속에서 돌을 그렇게 둥글게, 부드럽게 만들어낸 것이 바다라는 사실을 보면서 그는 그 돌에서 바다와 삶을 읽었다. 삼킬 듯 강하게 부딪히고, 다 부숴버릴 듯 때리고서는 정작 포말로 흩어지면서 온 자리로 돌아가 버린 그 파도에서 사진작가 최광호는 숨을 읽었다. 태초의 존재를 잉태하는 어머니 바다. 모든 것이 다 용납되고 결국 깎이고 깎여 만든 그 완벽한 둥긂과 부드러움. 이러한 생각은 깨진 유리 조각이라는 오브제로 다시 연결된다. 그 날카로움 안에 내가 있고, 그 안에서 나는 무엇을 좇으며 사는 것인가? 최광호의 사진 안에서 깨진 유리 조각과 둥근 돌은 결국 기의를 생성하는 오브제가 된다. 사진작가 최광호는 깨진 유리 속에서 본질과 근원을 화두로 집어 들어, 삶과 숨 그리고 실존을 찾는다.

부산의 바다는 임진년 조선, 일본군이 침략을 해 이 땅을 유린하는 그 시초가 되는 지점이자 남의 나라 월남 - 최광호가 사진을 처음 시작할 때 그 때 우리는 그곳을 이렇게 불렀다 - 그곳을 유린하러 가는 길이기도 했다. 그 바다를 통해 가을 어느 날, 미군이 부산에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혼종의 땅, 초량 텍사스촌에서 작가는 그들을 만난다. 항공모함에 탄 7,000명의 미 해군이 쏟아져 내린 날, 그곳에서 바다를 건너 온 그 사람들은 필리핀과 섞이고, 러시아와 섞이고, 베트남과 섞이고 한국과 섞인다. 작가 최광호는 그를 통해 주고 받는 바다, 모두가 하나로 섞이는 터로서의 바다를 읽는다. 그리고 그 섞임을 최광호는 자연으로 읽는다. 거부하지 않는, 모든 것을 다 받아주는 그런 존재로서의 자연. 그 안에 가식도 없고, 예의도 없는 존재로서의 자유. 작가는 부산의 바다에서 삶의 터전을 찾더니 어느덧 존재의 근원적 질서, 자유의 본질을 찾는다. 사진작가 최광호의 사진이 이미지와 행위로써 하나의 공간 안에서 섞여 재현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그의 세계관 때문이다. 그는 세상을 실존을 바탕에 두고 그 위에서 자연과 자아가 섞여 자유롭게 돌아다닌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실존이고, 자유이고, 혼종이다.

지금 여기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사람 냄새가 나는 사람 사는 곳이라면, 사진작가 최광호가 추구하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사진은 우리들에게 별다른 특별한 감흥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슬픈 일이겠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람이 쫓겨난 세상이다. 돈에 쫓겨나고, 명예에 쫓겨나고, 권력에 쫓겨났다. 세상에서 사람은 죽고 이미지가 살아 춤추고, 너나나나 할 것 없이 돈, 돈, 돈, 돈 노래를 하는 세상이다.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는 그리 희망 찬 곳도, 감동이 있는 곳도, 따뜻한 곳도 아니다. 그런 세상이다 보니 사진하는 사람들도 마냥 이미지와, 돈을 좇는다. 누군가가 최광호의 사진에서 감동을 받는다면, 그것은 그의 사진 이미지가 아름다워서도 아니요, 비장해서도 아닐 것이다. 우리는 삶에 지쳐 있는데, 그 안에서 좌절하고 슬퍼하고 있는데, 그의 사진은 우리가 쉽게 지쳐하고, 비관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최광호의 낙천주의적 삶의 사진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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