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을 향한 기록들의 몽타주; 박영숙과 카메라, 그리고 사진 속/밖의 여성들”에서 발췌
박영숙의 카메라는 근본적으로 연출적 위치에 서 있다. 박영숙의 카메라 작동에서 중요한 것은 거리두기를 통한 관조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영적 분위기(Aura), 또는 자본주의적 편의주의나 과학주의를 위해 마련되는 구경거리나 증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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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쇠퇴는 사진의 발흥과 일치 한다’라는 존 버거의 질문이나, ‘사진의 예술성 요구는 사진이 상품으로 등장한 것과 동시적으로 나타난다’라는 벤야민의 말을 다시 기억하고 생각해야 한다... 정치, 학문, 인상학적 연관관계에서 벗어나 대상을 순수하게 시각적 관점에서 보는 소위 창조적 사진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 즉 시각적 혁명을 통해 새로운 미적 특성을 강조하려 했던 ‘예술작가들’을 지나, 시각적 영감은 사회적 경험에 따르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는 풍자 화가들의 곁에 가 선다. 같은 맥락에서 박영숙의 카메라는 ‘즉각적 향유’라고 일컬을 수 있는 어떤 예술적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서라거나 혹은 모더니즘의 그 숱한 선언문적 예술운동들이 그러했듯이 예술의 철학적 본질을 구현하기 위해 대상을 포착하지 않는다. 그녀는 표현매체로서 카메라를 믿는다.
도대체 카메라를 통해 무엇이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일까? 빛을 발하고 있는 여성들의 미친 내면이, 바다이며 대지이며 숫자이며 활자인 이미지인 검게 붉게 푸르게 타오르는 피며 살인 내면의 풍경이, 어떤 정지가 어떤 숨 막히는 차오름이 여성이 동지이며 연인이며 자매이며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손녀인 여성들의 나라가, 사진의 기록적 가치가 중요시했지만 그러나 사진을 통한 표현의 가능성을 더 확장시키기 원했던 그녀는 직관과 연출의 힘을 교묘히 활용해 이렇듯 여성의 내면세계를 표면 위로 끌어올려 일상적 삶과 교직을 이루게 한다.
관람자의 눈에 바싹 들이대어진 ‘홀린/미친/들린’ 여성들. 이 이미지들에 충동된(drived) 관람자들은 이제 어쩔 수 없이 말을 시작해야 된다. 겉의 말이든 속의 말이든 소리를 내야 한다. 관람자가 여성일 경우, 그것은 자기 안에서 빛을 발(發光)하고 있는 또 다른 ‘자기들’을 만나는 홀림/미침(發狂)의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김영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