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유와 은유 혹은 외침과 침묵
침묵이란 뭘까. 소리없음일까. 아니, 침묵은 소리 없음이 아니다. 소리를 아는 사람만이 침묵도 아니까. 침묵은 그러므로 소리 없음이 아니라 다른 소리다. 사진은 침묵한다. 사진은 이미지이고 이미지는 말이 없으니까. 그러나 사진에게 귀를 기우려 본 사람은 안다. 사진에서는 소리가 난다. 사진은 침묵의 이미지가 아니라 소리의 이미지다. 사진을 본다는 것, 사진을 알아보고 체험한다는 것, 그것은 사진을 듣는 일이기도 하다.
이갑철의 사진들에서도 소리가 난다. 그 동안 발표했던 그의 사진들 안에는 다양한 소리들이 있다. 때로는 차가운 냉소가 들리고(《거리의 양키들》), 때로는 우울의 탄식이 들린다(《타인의 땅》). 물론 그 냉소와 우울 사이사이에서 구름들 사이로 언뜻 비치는 햇빛처럼 철없는 아이의 홍소와 철 안든 어른들의 낄낄거림도 들린다. 그렇지만 그 소리들은 모두가 하나의 소리로 수렴된다. 그건 ‘외침’이다. 웃음이든 우울이든, 가볍든 무겁든, 이갑철의 사진들은 모두가 어떤 외침의 표현이다. <충돌과 반동>의 사진들이 특별한 건 이 외침들이 주제 자체가 되어 사진들이 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외침들이 다이내믹하고 충격적인 이미지만을 통해서 표현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이미지들을 외치게 만드는 건 이갑철만의 사진적 목소리, 그의 표현 기법들이다. 과감한 사선구도, 피사체 흔들기, 대상과 그림자의 음영 병치, 피사체의 일부, 특히 시각적 관습이 주목하는 주요부를 삭제시키는 편절기법(fragment) 등등이 그것들이다.
그러면 이 외침들은 무엇의 소리들 일까. 그 소리는 시간의 소리다. 이갑철의 사진들에서는 시간들이 외친다. 그 외침은 순간 이미지라는 목청을 통해서 터져 나온다. 물론 사진은 모두가 순간 이미지이다. 하지만 순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결정적 순간이다. 결정적 순간은 시간을 정지시키는 시간이다. 결정적 순간의 사진 이미지 안에서 시간은 이미지로 고정되어 프레임 안에 갇힌다. 예컨대 브레송이 장인적으로 보여주는 시간의 기하학적 이미지가 그렇다. 하지만 이갑철의 사진들이 포획하는 순간은 고정되어 닫힌 결정적 순간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의 순간들은 말하자면 열리는 순간, 통과하는 시간의 순간들이다. 이갑철이 포획하고자 하는 시간은 한 특별한 순간이 아니다. 그의 렌즈가 낚아채고자 하는 건 순간이 아니라 흐름, 지나감, 통과함이라는 시간성, 그러니까 시간의 운동성이다. 이 운동성이 수많은 결정적 순간들의 사진들과는 변별되는 또 다른 사진의 시간성, 미결정의 시간성, 불확실성의 시간성을 체험케 한다. 이갑철의 사진들이 특별하고 충격적인 이미지 체험을 유발시키는 건 다름 아닌 이 미결정적이며 불확실한 시간의 운동성 때문이다.
하지만 이갑철의 사진들이 불러일으키는 충격적인 사진적 체험, 외침의 체험은 특별한 시간성의 포획을 너머서는 것이다. 그 외침의 체험은 그 불확실성의 순간 안에서 표현되는 그 어떤 물성, 정신분석은 리비도라고 불렀고, 철학은 실체(substance)라고 부르는, 하지만 나라면 ‘인간적인 것’이라고 부르고 싶은 생체이면서 영혼인 어떤 인간적인 힘, 굳이 명명하자면 ‘생기(生起)’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이갑철의 사진들에 대한 비평 담론들에서는 한국적 토속성, 무속성, 전통성 등등의 개념들로 합의되어 있지만, 그 인간적 생기는 그런 지엽적인 특수화를 초과하는 보편적 에너지, 사람과 사물, 자연과 문명, 육체와 영혼 사이를 넘나드는,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존재 안에 껴안고 있는 인간에게만 내재하는, 가장 인간적인 그러면서도 마성적인, 망각되었으나 사라지지 않은, 기억될 수 없으나 생의 곳곳에서 면면히 살아서 작동하는, 명명할 수 없지만 일상의 틈새로 얼굴을 드러내면서 자기존재를 증명하는 그 어떤 생기다. 이갑철의 사진적 순간들이 결정적이 아니라 미결정적이고 통과적인 순간인 것도 다름 아닌 이 생기의 힘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생기의 힘은 정지적이고 닫힌 시간이 아니라 통과적이며 열린 시간 안에서만 외침의 숨통이 트이기 때문이다. 숨통이 트인다는 건 그런데 이갑철에게 자기표현이면서 동시에 교감이면서 육화이다. 예컨대 바위들 사이에서 악을 쓰고 “우는 아이”는 이미 천공과 하나이고, “선돌을 들어 올리는 사내”의 육신은 늙은 혼이 들어있는 바위덩이와 하나이며, “소머리를 뒤집어 쓴 무당”의 혼은 이미 소의 혼과 구분되지 않는다. 하지만 생기의 외침이 가장 본질적으로 드러나는 사진은 “아버지와 아들”이다. 블랙홀처럼, 동굴처럼 열리고 뻥 뚫린 아들의 검은 입은 외치는 입이다. 외침은 그러나 여기서 다만 생기의 토해냄만이 아니다. 그 힘을 토하면서 열려진 입으로 또 다른 생기가 삼켜진다. 이갑철이 포착하는 열린 시간의 공간은 내보냄과 들어옴, 토함과 삼킴, 주기와 받기를 통해서 나와 타자가 통과하고 교환되는 소통의 공간, 외침의 공간, 상호육화의 공간이다. 생기의 외침이 시간을 열고 열린 시간이 생기를 외친다. 그렇게 나와 타자의 생기는 혼효되면서 서로 육화된다. 이갑철의 사진들은 모두가 이 혼효와 육화가 생성시키는 생기의 아우라이다. 이갑철의 사진이 주관적이라면 그의 주체는 육화의 주체이고 그의 사진이 인간적이라면 그의 인간은 외침의 인간이다.
... 그런데 오랫동안 궁금했었다. 이갑철이 도시를 찍는다면 어떤 도시들이 태어날까. 어떤 도시의 얼굴들이, 어떤 도시의 순간들이 프레임 안으로 포획될까. 나의 궁금증은 무엇보다 평소 지니고 있던 이갑철의 사진영역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이갑철의 시선이, 주제의식이, 그가 나포하는 저 생기와 외침의 아우라가 토속성, 무속성, 전통성이라는 이름으로 늘 지엽적 공간, 주변부 공간에만 제한되면서 소위 별난 것으로 특수화되는 것이 나는 늘 아쉬웠었다. 궁금증의 또 다른 까닭은 도시에 대한 나의 이중감정 때문이다. 도시는 이중적이다. 도시는 한편 소리들로 포만하다. 군중들의 소리, 교통수단들의 소리, 시위하는 소리, 경고의 확성기 소리, 연애하는 소리, 싸우는 소리, 우는 소리, 거리의 음악 소리 등등 대도시는 그야말로 외침들의 용광로이다. 하지만 그 외침들은 생기의 외침들이 아니다. 혼잡하고 빠르고 부딪히고 섞이고 시끄러운 그 소리들은 오히려 또 하나의 침묵, 생기가 아니라 소외가 만들어내는 시끄러운 침묵의 소음일 뿐이다. 그렇다면 도시는, 많은 이들이 그렇게 비판하듯, 소외들로만 가득한 공간, 외침의 진공 공간, 생기의 황무지 공간일 뿐일까.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갑철의 프레임 공간을 채우는 저 외침의 생기는 특수한 공간 안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에나, 그러니까 이 시대의 중심부 안에도, 도시 안에서도 면면히 존재하고 작용하는, 존재의 시공간 어디에서나 존재하고 작용하는 보편적 생기이기 때문이다. 그 생기는 추방되기는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밖으로 추방된 것은 안으로 귀환한다. 때문에 존재의 생기는 무속과 토속의 세계에서는 직접적으로 자기를 드러내지만, 그 직접성의 세계를 추방하고 세워진 도시 공간에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아마도 은밀하게, 그러나 그만큼 더 강렬하게, 자기를 드러내면서 외쳐대는지 모른다. 이갑철은 이 도시의 외침들을 어디서 발견하고 어떻게 포획할까, 이것이 나의 오래된 궁금증이었다. 그리고 이갑철은 도시로 들어왔다. 그것도 도시와 바다가 공존하는 항구도시 부산으로...
이갑철의 <부산 참견錄>에서 제일 먼저 확인되는 건 이 사진들이 역시 이갑철의 사진들이라는 사실이다. 흔들기, 지우기, 기울기, 무엇보다 빛과 어둠의 강력한 대조법 등등 이갑철 특유의 카메라 테크닉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카메라 워킹이 프레임 안에 포착하고 있는 80여점에 달하는 도시 이미지들은 그야말로 충돌하고 반동하는 다양성을 보여준다. 그 다양성을 섬세하게 변별하고 분석하는 일은 뒤로 미루고, 나는 우선 그의 부산 사진들을 크게 두 섹션으로 구분한다. ‘환유 이미지’와 ‘은유 이미지’의 두 영역이 그것이다. 환유의 원칙은 ‘접촉’이다. 환유의 순간에 사물과 사물은 인위적으로 배치되고 질서화 되어 있는 경계를 허물면서 돌연스럽게 서로에게 뛰어들어 부딪히면서 접촉한다. 이 순간은 사물들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며 이 열림의 문으로 순간 이미지가 외치면서 카메라로 뛰어드는 순간이다. 이 순간에 작가가, 카메라가 할 수 있는 할 수 있는 건 그 열림을, 사물의 뛰어듬과 외침을 받아들이면서 셔터를 누르는 일 뿐이다. 환유의 순간은 말하자면 습격당함의 순간, 충격적 수동성의 순간, 무의도의 순간, 작가의 순간이 아니라 카메라의 순간이다. 이때 사진은 찍는 게 아니라 찍혀진다.
이갑철의 부산 사진들에서 이러한 환유적 접촉 이미지는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구체적 접촉, 보이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접촉이다. 예컨대 어둠 안에 앉은 여인과 빛을 발하는 은빛 갈치들을 보여주는 시장 좌판의 사진이 그렇다 (이때 나에게 외치면서 뛰어드는 이미지는 여인의 침묵도 은빛 갈치들도 아니다. 그건 침묵하는 여인의 입 안에서 외치면서 뛰어나오는 빛나는 혀들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상상적 접촉(바르트라면 탈코드적 접촉이라고 불렀으리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접촉이다. 이 상상적 접촉은 이갑철의 사진들에서 다양한 매개항을 통해서 유발된다. 그 중에 하나가 인물들의 ‘군집성’이다. 부산 사진들 속에서 인물들은 그때그때 주제에 따라 단수형, 복수형, 군집형의 이미지로 분류되고, 또 저마다 다른 표현방식으로 프레임 안에 담긴다. 복수형 인물 이미지들이 전면상으로, 단수형은 거의 모두 뒷모습으로 렌즈 안에 담긴다면 군집형 인물 이미지의 특성은 불투명성이다. 그것이 광장을 배경으로 하든, 강렬한 스포트라이트 아래이든, 빗물이 흐르는 유리창 밖이든, 군집 이미지는 모두가 개체성을 식별할 수 없는 불투명성으로 처리된다. 하지만 이 불투명한 인물군집성이 예기치 않은 환유 이미지로 전복되는 건 어쩌면 그 중에서도 가장 평범한 이미지, 해변의 밤 풍경 안에 들어있는 인물들의 군집 이미지다. 예컨대 언캐니(the uncanny)의 감정을 자극시키는 비 젖은 유리창 밖 그림자 인간들과 비교할 때, 어느 여름 밤 해변의 일상 풍경이랄 수 있는 이 군집 이미지는 눈에 띠는 특별함이 없다. 그러나 그 평범한 밤 해변의 군집 이미지는 바다와 땅이 맞닿은 해변이라는 경계공간성, 분명 하나씩 구분되지만 하늘의 별들처럼 점점이 무작위로 흩어져 개성을 찾을 수 없는 개체성, 그리고 그 형태적 개체성의 완고한 차이마저 지워버리는 불투명한 빛 그늘 안에서 돌연 예기치 않은 환유 이미지로 대체된다. 그 환유 이미지가 나의 경우, 개인성이 아니라 집체성으로만 존재하는 그 어느 인간 종족, 예컨대 수륙을 오가며 다만 군집으로만 살았다는, 지금 여기 우리 도시인들의 멀고도 먼 선조였다는 저 양서류 종족 인간의 이미지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구체적 사실과 상상적 감각이 마주치며 접촉하는 환유 이미지는 군집 인물 이미지만이 아니라 단수형 인물 이미지 안에서도 발견된다. 이 경우 우선 주목되는 건 ‘생략’의 테크닉이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언덕을 오르는 학생의 뒷모습 사진은 이갑철의 생략 테크닉이 어떻게 환유 이미지를 생성시키는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준다. 갑자기 목이 잘려나가 토르소가 되어버린 신체 이미지는 돌연한 두뇌부의 생략을 통해서 그 어떤 부재의 신체를 불러들인다. 다시 말해 거의 폭력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과감한 생략은, 무어라고 명명할 수 없는, 흔히 우리가 신체라고 부르는 사지 조합의 경계를 이탈하는, 가방의 중압 아래 억눌린 채 잠재하는 생기가 외치면서 뛰어나온다면 존재하게 될, 그 어떤 해방의 신체를 충격적으로 비워진 토르소의 공간 안에서 태어나게 만든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하는 환유적 매개는 ‘출몰성’이다. 이갑철의 단수형 인물들은 대체로 여성들이고 그 중에 많은 이들이 휴대폰에 몰두하지만 한 여인만은 예외다. 이어폰을 꽂고 휴대폰을 손에 든 그 여인은 지금 막 어둠으로부터 빛 속으로 걸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여인의 순간 이미지는 걸어서 한 걸음씩 빛 안으로 들어서는 진입의 과정이 아니라 바로 그때 거기에서 갑자기 솟아오르는 출몰의 이미지다. 다른 휴대폰 여인들의 포즈와 달리 이 여인의 표정과 몸짓이 도전적이고 도발적인 것 역시 이 출몰성 때문이다. 그러나 출몰성의 충격이 더 강렬하게 체험되는 건 뒷모습으로 어둡고 텅 빈 거리를 내다보는 짧은 원피스의 여인이다. 특이할 것이 없는 이 여인을 갑자기 환유 이미지로 바꾸는 건 그런데 여인과 함께 포착 된 보도 가까운 곳의 맨홀이다. 비록 뚜껑이 덮여 있지만 이 여인은 지금 막 그 맨홀로부터, 그 어떤 심연으로부터 솟아나온 것 같다. 게다가 뒷모습의 여인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그 얼굴의 부재가, 부재가 일으키는 충동이 자신도 모르게 절박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 여인의 얼굴은 무엇일까. 그 얼굴이 세상에서 여성이라고 부르는 그런 여인의 얼굴일까. 또 묻게 만든다. 이 얼굴이 없는 여인은 지금 텅 빈 거리를 향해서 무엇을 하는 걸까. 다만 거리를 내다보는 걸까. 아니면 그 진공의 거리를 향해서 무언가를 외치고 있는 걸까. 이갑철의 환유 이미지들은 그 앞에서 아무 것도 읽지 못하게 한다. 다만 감각하게 만들 뿐이다. 그 어떤 부재하는 이미지를 접촉하고 그 이미지의 외침을 듣게 할 뿐이다.
하지만 이갑철의 부산 사진들에는 또 하나의 섹션, 더 많은 이미지들이 포함되는 ‘은유적 이미지’의 섹션이 있다. 은유의 원칙은 ‘거리’, 더 정확히 말해서 ‘심미적 거리’다. 이 거리 안에서 카메라는 긴장과 인내로 충전된다. 대상을 응시하고 관찰하면서 순간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 응시와 관찰의 틈새로 빠르게 도주하는 대상을 셔터로 정지시켜 렌즈로 나포한다. 대상은 습격하는 게 아니라 습격당하면서 낚아채어져 포획된다. 은유적 이미지는 카메라에게 찍혀지는게 아니라 카메라가 찍음으로서 생산된다. 예컨대 일렁이는 바다와 저마다 다른 뒷모습이 조합된 해변의 네 여인들, 칼로 베인 듯 빛과 어둠으로 날카롭게 구획된 과일들, 바쁘고 무심한 행인들과 보시를 구하는 스님의 대치적 조합, 무표정한 표정으로 도열한 배들의 마스트와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서 있는 네 명의 남자, 바람에 분산되는 머리칼과 몰입한 옆모습으로 구성된 휴대폰 여인의 프로필 이미지, 함께 벤치에 앉은 목이 잘린 남자와 목이 있는 조형물 등등의 이미지들은 정교하고도 정확한 심미적 거리 안에서 포획된 은유적 이미지들처럼 보인다. 이 이미지들이 혹은 차갑고 혹은 쓸쓸하고 혹은 불안한 심기를 건드리면서도 그러나 어쩐지 부드럽고 안정적이고 낭만적으로 다가오는 건 다름 아닌 이 심미적 거리의 견고함 때문이다. <부산 참견錄>의 도시 사진들은, 적어도 내게는, 꽤 많은 이미지들이 심미적 거리가 생산하는 은유 이미지의 섹션에 포함되는 것처럼 보인다. 다름 아닌 그 심미적 거리와 은유 이미지의 확장이 이번 전시에서 눈에 띠는 새로움, 그러니까 이전의 사진들, 특히 <충돌과 반동>의 사진들과 변별되는 이갑철의 변모로 다가오는 건 나만의 시선일까.
환유 이미지는 거친 목소리로 외치고 은유 이미지는 서사의 문법으로 이야기 한다. 이갑철의 부산 사진들은 이 환유와 은유, 외침과 서사를 다 같이 내포한다. 다 같이 내포한다는 건 그런데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작가의 세계가 포괄적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긍정적 의미다. 다른 하나는 이 두 영역 사이에서 작가가 아직은 미결정 상태에 머물고 있다는 망설임의 의미다. 만일 이갑철이 망설이고 있다면 그 망설임은 무엇 때문일까. 그는 불안정과 충돌과 접촉으로 혼돈스러운 환유의 영역으로부터 심미적 거리의 영역, 서사적 은유의 영역으로 건너가려는 걸까. 언급했듯이 <부산 참견錄>의 많은 사진들이 은유적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참고하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건너감이 반드시 염려스러울(?) 이유는 없다. 한 작가의 세계는 고착적인 것이 아니라 이동하고 변모하는 것이니까. 그것이 매너리즘의 위험성을 안고 있는 선택의 강박에서 벗어나서 보다 확장된 작품의 영역을 개척하고 구축하는 당연한 길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변함없이 분명하다. 만일 그 누군가가 저 생기의 외침과 환유의 순간을 프레임 안에 담는다면, 그건 여전히 이갑철의 카메라뿐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 생기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 귀와 꿰뚫어 볼 수 있는 눈, 그리고 그 순간적 환유의 세계를 포획하는 날쌤과 예리함의 장인적 테크닉을 갖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그뿐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갑철이 환유와 은유 사이에서 미결정 상태라면 결정은 당연히 그의 몫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림뿐이다.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알고 있는 최고의 미덕 - 그건 기다림이니까.
미학. (사) 철학 아카데미 대표 김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