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파리, 텍사스: 중국집에서 웨딩홀까지
파리 혹은 패리스(Paris or Pǽris)
미국 서부 텍사스에는 파리(Paris)라는 소도시가 있다. 지역 사람들은 ‘패리스’라 부른다. 그 누구도 프랑스 파리를 연상하지는 않는 듯하다. ‘파리’라는 지명에 대한 구체적 정황이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프랑스와 무관하지 않다는 정도만 알려졌다. 1993년에는 크기를 축소한 파리 에펠 탑 레플리카를 세우기도 했다. 물론 우리에게 텍사스 주 파리는 영화로 더 알려졌다.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1984)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가 아들과 함께 아내를 만나기 위해 텍사스 파리를 찾아가는 내용을 담았다. 언뜻 로맨틱한 인상을 주는 파리라는 언어 기표는 황량한 대지와 온기 없는 모텔, 퇴락한 상가 뒤로 자취를 감추고 관객은 기호의 불일치로 인한 당황함을 견뎌야 했다. 영화는 제목의 이중성이 자아내는 궁금증을 풀어 주기보다 관객의 기대 반대편 세계를 그린다. 우리가 기대하는 파리의 이미지가 어디에서 어떻게 기인했는지 구체적이지 않고 파편적일 수밖에 없듯이, 감독은 남자 주인공이 서서히 기억을 되찾는 과정을 통해 기억의 원형 자체에 물음을 던진다. 이 영화는 아메리칸 드림을 가졌던 독일 출신의 빔 벤더스가 미국을 이중적으로 바라보는 고민을 담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에서 꿈을 쫓는 유럽인이 마주한 것은 생존을 위해 미래를 포기한 기성세대의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더불어 유토피아를 꿈꾸는 인간의 욕망에 비해 너무도 거대한 자연과 대비된, 표정이 사라진 인간과 도시의 모습은 현재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사진의 체험
굳이 〈파리, 텍사스〉를 언급한 이유는 노기훈의 〈1호선〉이 정통 스트레이트 사진을 표방하고 그가 발견하고 포착한 장면들이 현실을 재현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현실이 곧 영화 세트처럼 내용이 사라진 표면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1호선〉은 대한민국 최초의 철도 1호선 기점인 인천역부터 당시 종점인 노량진역까지 걸으며 사진으로 기록한 프로젝트다. 작가가 인천의 창작 스튜디오에 입주하면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를 설명하기 전에 그의 또 다른 작업 〈구미〉를 돌아본다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구미〉는 2009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진행형 프로젝트인데, 구미는 노기훈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는 정기적으로 구미를 찾아서 가까운 친구들의 삶을 사진(최근에는 영상도 함께)에 담는다. 올해부터는 아예 서울 생활을 잠시 접고 귀향했다. 그의 사진은 일터, 기념일, 결혼식, 출산 같은 친구들의 일상을 담고 있다. 일상과 작업의 경계도 느슨하다. 구미 친구들의 일상은 평범하다. 버스 타고 출근하는 모습도 있고 가족사진도 보인다. 자연스레 친구들의 일터도 사진 속으로 들어온다. 구미 성장기라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사실 사진은 구미라는 지역을 특별히 드러내지 않는다. 자주 등장하는 공장의 모습들이 구미라는 도시의 성격을 알려 줄 뿐이다.
노기훈이 사진을 찍는 이유도 의외로 단순하다. 본인의 말처럼 사람과 걷기를 좋아해서일 테지만, 그는 사진을 찍기 위해 길을 걷고 촬영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덕분에 그의 사진은 체험의 인상이 감돈다. 사진을 찍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만으로 체험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내가 말하려는 ‘사진의 체험’이란 사진을 통해서 발견하는 인식의 경험으로 제한하고 싶다. 이러한 사진의 체험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롤랑 바르트의 사진 읽기 역시 사진의 체험이라 부를 수 있다. 바르트는 어떤 사진에 유독 이끌리는 것을 모험(adventure)이라 불렀다. “모험의 원칙이야말로 사진을 존재하게 만든다. 반대로 모험 없이는 사진도 없다.”1) 글쓰기의 영도를 주장한 바르트에게 쓰기와 읽기(창작과 감상)는 분리된 행위가 아니었을 것이다.
노기훈의 작업 과정을 바르트의 관점을 보면 장소를 경험하는 행위와 사진 촬영이 서로 분리되지 않은 듯하다. 그는 한 세기 전에 살았던 만보객처럼 배회하면서 세상을 이해하는 걸 즐기는 사람이다. 여전히 필름 사진을 고집하는 이유도 비슷한데, 사진을 저장한 외장하드를 잃어버린 뒤로 사진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사진이란 정보가 아닌 이미지이며 걸으면서 마주하는 것들, 이끌리는 사람, 사물, 건물과 풍경을 담는 생활이라 불러도 무방할 듯싶다. 그의 사진에 담긴 구미의 일상은 오늘을 사는 많은 젊은이의 삶과 유사하다. 지구 현실의 파편을 방백처럼 폭로하지도, 그렇다고 〈인간극장〉식 긍정의 미학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단, 작가의 시선에 담긴 ‘낭만적 우울감’을 지우기는 어렵다. 사진 한 장은 정지된 장면으로 보지만, 연속되는 앨범 사진을 볼 때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사진과 사진 사이에 호흡과 리듬이 생기고 곧이어 감정이 덧붙여지기 마련이다. 그것이 30대 초반의 작가가 갖는 자아의 부풀림인지, 아니면 낭패감인지 파악할 수 없으나 무표정한 현대 사진의 특징 이면에 감출 수 없는 감정이 밴 것은 빔 벤더스의 영화2) 세계와 흡사하다.
질문으로서 인천
구미의 사진이 작가에게 익숙한 사람과 장소에서 시작하여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심급으로 향한다면, 〈1호선〉은 인천이라는 장소가 갖는 특정성과 역사성에서 출발한다. 이 프로젝트는 애초 심급을 가질 수 없고 작가와 장소 간의 일시적이고 즉흥적인 관계만 기록된다. 작업의 시작은 단순하다. 한번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는 인천이라는 장소와 그곳에 관한 상투적이고 다소 악명 높은 소문이 전부인 상태에서 직접 몸으로 인천을 경험해 보자는 취지가 시작이었다. 인천에 관한 소설, 문헌 등을 수집하고 대한민국 최초의 철도길 주변을 거슬러 가면서 개통 백 년에 이르는 시간의 겹을 관찰하고자 했다.
1호선과 식민 통치는 분리될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다. 한국 근대사에서 식민의 경험은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일제는 도시의 전통을 파괴하고 그 위에 근대 도시를 구축했다. 이는 삶의 토대를 이루는 기억을 지우고 그 위에 ‘근대’를 세우려는 전형적인 식민 개발 정책이었다. “근대 건축과 근대 도시 계획의 형성사를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역사를 통해 계보학으로 재조명해 보면 미학과 과학, 기법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와 권력, 지배의 문제로 이해된다.”3) 이러한 의미에서 인천은 일제에 의해 형성된 항구 도시이자 경성과의 지정학 관계 덕분에 발전한 도시다. 인천 출신의 국문학자 최원식의 글을 인용해 보자.
“여기서 잠깐 경인선의 역사를 들춰 보자. 하인천역 앞에 철망으로 보호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1934년 4월 5일에 10년생을 심었다니까 이 나무 나이가 고희를 넘긴 셈이다. 하인천역(현재 인천역)에 갈 일이 있는 분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 나무 밑동에 놓인 표석을 읽어 보시기 바란다. 여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경인선의 기구한 역사가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광무 원년(1897) 3월 2일 미국인 모스에 의해 우각리에서 기공식.
광무 3년(1899) 4월 23일 일본인에 의해 북성동에서 재기공식.
광무 3년(1899) 9월 18일 인천-노량진 간 33.2킬로미터 개통.”4)
최원식은 경인선 개통을 “‘모든 고정된 것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세계 자본주의의 물결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5)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노기훈이 포착한 인천-노량진 간 1호선 역 주변의 모습은 어떠한가? 정말 고정된 것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일까? 아니면 권력 관계에 의해 인천과 노량진 주변이 서로 다른 시간의 길을 걸었던 것일까? 〈1호선〉의 사진들은 특별히 기억을 환기시키지도 않고 압도적인 시각의 스펙터클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너무도 소박하여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을 주는 정도다. 적어도 근대 이후의 예술에서 낯선 것을 통한 환기는 매우 중요한 창작 요소이자 기억과 인식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점에서 노기훈의 사진이 인류학적 반향이나 조형적 공명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가 포착한 대상은 역사의 흔적이나 유적도 아니고 도시 전체를 하나의 조형물로 압축한 현대 예술 사진의 전형도 아니다. 어쩌면 의도적인 아마추어리즘을 표방하거나, 아니면 하이테크놀로지 대신 감각을 최대한 활용한 대형 사진을 찍음으로써 자신이 인식하는 만큼의 세계를 도려내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알다시피 눈으로 보는 세계와 사진으로 보는 세계는 다르다. 닮았을 뿐 절대로 만날 수 없는 평행의 세계다. 이미지가 위험한 이유는 현실의 세계가 이미지의 세계를 닮으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노기훈은 그 누구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아는 작가다. 더 스펙터클한 사진, 더 유혹적인 사진 대신 인간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세계를 포착하고 특별한 사건이나 장소 대신 흔하디흔한 대상에 시선을 주는 이유는 지식이 아닌 사진을 통한 경험적 사유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원인은 그곳이 바로 주변부라는 사실이다. 이미 백 년 전에 철도가 개통되고 항구와 공장 지대가 형성되면서 역 주변에 유동 인구가 몰렸지만 인천과 서울 사이는 가깝고도 먼 외곽 도시(suburb)다. 인천부터 노량진 사이의 26개 역은 식민 시대 수탈의 역사 현장이자 개화기와 산업화의 초석이 된 장소다. 철도가 개발되면서 도시가 새로이 형성되기도 했지만, 주안역처럼 염전 지구라는 장소의 특성을 인정받았던 곳마저 산업화에 의해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상실감은 크다. 사실 이러한 정황은 역사서나 논문 등으로 쉽사리 찾을 수 있는 정보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머무는 지역, 장소를 자신의 방식으로 배회하고 마주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장소가 품은 대지 아래의 울림을 들을 것이다. 〈1호선〉의 무표정한 사진들이 내포한 ‘우울’은 작가 자신이 갖는 매우 사적인 감정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화려하고 거대한 것에 기생하듯 살아가는 변방에서 발견되는 혼성적이고 비대칭적으로 형성된 삶의 구조가 일으키는 정서일 수도 있다.
가변적이고 취약한
사진은 대상이 필요하다. 사진의 기록성은 대상과 사건에 관한 정보, 거스를 수 없는 진실의 가치로 평가된다. 물론 사진술에 관한 미학적 해석, 진실을 소개하려는 사진가의 열정도 포함된다. 이렇듯 기록성 중심에 위치하던 사진이 자신의 고유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으로 찾아낸 현대 예술 사진 또는 조형 사진의 영역에서는 기록성과 정보성의 가치가 희미하거나 아예 제거된다. 1990년대 이후 현대 예술 사진은 인간, 도시, 사회의 단면을 중립적으로 기록하는 유형학적 성격을 강조한다. 더불어 기록이 강조된 사진의 경우, 고전 회화를 독해하듯 스토리텔링에 무게가 실렸다면 현대 예술 사진은 시사 정보가 아닌 시각 정보로 채워진 오브제라 부를 수 있는 규모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노기훈의 사진에 대한 첫인상은 무표정함으로 대표되는 현대 예술 사진의 법칙을 따르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반면 사진 전반을 아우르는 우울의 정서는 그의 사진을 단순히 중립적 사진으로 정의 내릴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자아낸다. 작가 자신이 본인의 사진을 중립적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앨릭 소스(Alec Soth)의 사진 기행도 떠올릴 수 있다. 소스가 포착한 미시시피는 짐 자무시가 〈천국보다 낯선〉에서 묘사한 출구가 막힌 세계처럼 불안하고 위태롭다. 소스의 다큐 사진은 그 누구보다 쉽게 그리고 강력하게 미시시피를 산출했다.
노기훈의 〈1호선〉은 소스와 유사한 부분이 많지만 소스처럼 장소를 특화시키지는 않았다. 반대로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노기훈은 1호선 주변의 장소를 산출하는 대신 기호가 미끄러지는 텅 빈 장소로 포착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각 사진에 명기된 표제가 장소를 지시함에도 불구하고 실제 장소를 연상시키는 기호의 강도는 희박하거나 아예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박이소의 취약한(vulnerable) 설치 작업처럼 ‘영등포-신길 노점’은 장소를 갖지 못한 채 주변부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동시대 한국사회의 단면을 하나의 ‘사진적 장면’으로 포착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사진 한 점이 아닌 사진과 사진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 보자. 꽃집 가판대의 플라스틱 통 안에 꽂아 놓은 꽃다발, 신길역 주차장 풍경, 노량진 거리의 노점 등은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도시의 틈새다. 그것들은 거대한 자본주의 도시 안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자 어쩌면 가장 한국적인 클리셰지만, 1호선을 지시하는 기호는 아니다. 오히려 〈1호선〉의 장면들은 중심과 주변, 공존과 기생의 논리가 혼재된 상태이며, 노기훈은 사회적 기호도 역사적 의미도 희박한 불완전하고 연약한 대상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지도 모르겠다.
미술 비평, 인하대 교수 정현
1) 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Note sur la photographie, Seuil, 1980, 38쪽.
2) 영화 〈파리, 텍사스〉보다 먼저 제작한 〈도시의 앨리스〉(1973)도 추천한다.
3) 김백영, 〈지배와 공간–식민지 도시 경성과 제국 일본〉, 문학과 지성사, 2009, 34쪽.
4) 최원식, ‘경인선의 역사 문화 지리-동인천역의 상상적 복원’, 〈황해문화〉 4, 새얼문화재단, 1996. 9., 55쪽.
5) 위의 책, 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