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 賢者의 사진기와 달아나는 기미 機微
1. 사진기를 든 사람은 사회과학이나 정치 슬로건처럼 정면으로 대들 필요는 없다. 앎은 근원적으로 주체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앎은 결국 무상한 육체에 잠시 얹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주체는 육체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의식이 몸과 버성기는 중에 교과서에 등재되지 못한 앎들은 죄다 길을 잃는다. 그 미로 속에서 기미들은 달아나고 현자의 사진기는 안타깝게 뒤따른다. 길을 잃은 듯 보이는 앎을 ‘기미(機微)’라 한다. 자고로 이 ‘기미를 볼 줄 아는 게 현자(見小曰賢)’다. 플로베르의 말처럼 “예술가의 재능은 인내이며, 그의 창의성은 의지를 혹사하는 것이고 끈질지게 관찰하는 것(intensive Beobachtung)”[1]이다. 길을 잃은 작은 기별을 길고 차분한 관찰 속에서 읽어내지 못한다면 붓을 태우고 사진기를 녹이는 게 낫다.
2. 실은 그 모든 지식의 출처가 불안정한, 불안한 거기에 있다. 평온한 일상과 기미가 구성적으로 섞여 있는 이유도 불안을 드러내는 게 대상도 사진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피사체의 적절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사진기의 물리적 성능은 오히려 기미와 그 기별을 쫓는 감수성의 창구를 닫곤 한다. 이는 혀와 구강(口腔)의 가능성이 모국어의 자모(字母)에 의해 닫히는 형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 모든 가능성들이 사람의 목숨보다 빠르게 닫힌다는 사실에 유의하는 게 인문학자의 직관인 것처럼, 그 모든 불안한 흔들림들이 렌즈보다 빠르게 닫힌다는 사실을 깨단하는 게 현자의 사진기다.
3. 모든 일상은 완고하고 대개의 지식은 그 완고함을 방어하는 데에 동원된다. ‘사실’을 미명으로 구성된 비평조차도 그 지식-일상의 자기되먹임 구조를 넘어서지 못할 때가 적지 않다. 사회과학의 담론과 정치적 이슈를 쫓아다니는 카메라의 렌즈도 관련되는 지식을 ‘점유’한다는 점에서는 대차가 없다. 그러나 불안정한 흔들림 속에 있는 기미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며 매체의 고기능(high-tech)에 의해 붙잡아 둘 수 없다. ‘무당이 제 굿 못하고 소경이 저 죽을 줄 모른다’는 격으로, 대상의 객관성만으로 보증되는 게 진실이 아니며 작가의 재능만으로 현자의 사진기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4. 글도 그렇고 영상도 그렇긴 하지만, 특히 ‘달아나는 것들’에 속절없어 하면서도 하염없이 그것들을 쫓아가는 게 사진이다. 이런 뜻에서 보면 동원되거나 장식되거나, 혹은 글자의 명분 아래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뜨악하고 무춤하게 서 있는 사진들은 어리석다. 타자의 억울함이나 불안에 접근하는 글과 말의 어리석음이 자기관찰의 불가능성에서 유래한다면, 사진의 어리석음은 관찰의 편의와 그 직접성 속에서 자연스레 망각되는 ‘자기’에게서 온다. 바깥을 보고 있으면서도 또 ‘자기를 볼 줄 아는 게 현명함(見己曰賢)’이다.
5. 정주하의 사진을 증명할 도리는 없다. 그의 사람과 생활을 정 모르진 않지만, 이슈가 되어 등장한 사회적 객체들과 이순(耳順)에 이른 그의 식견과 재능의 사이에서 그의 사진들이 차지할 자리는 평자의 말에 고분고분하지 않다. 경험이 이론의 프레임을 넘쳐나듯이 그의 사진도 삶이 얻은 현명함으로써 평자의 말을 벗어난다. 그의 사진도 그 모든 사진의 숙명처럼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카메라는 어느새 현자의 지팡이처럼 짧게 드러나지 않은 기미와 조짐을 조준하고 있다.
김영민